시대변화에 비춰본 간호법 파열음

입력
2023.05.17 00:00
26면

후기 산업사회,전문직 분화 가속
법제화 갈등도 직업전문화에서 비롯
지속 가능한 사회에 맞는 해법 찾아야

대한간호협회 주최로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간호법 공포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있다. 서재훈 기자

대한간호협회 주최로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간호법 공포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있다. 서재훈 기자

간호법을 둘러싼 공방이 첨예하다. 이미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음에도 대립은 계속되고 있다. 여당의 건의로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대한간호협회는 거부권 행사 전부터 전체 간호사 중 98%가 집단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입법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내용은 간호사 업무 범위에 대한 것이었다. 최종 통과된 법안에서 업무 범위는 기존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갈등이 고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법제화 그 자체가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 법이 의사와 간호사, 또는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등 직역 관계에 변화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단 법이 만들어졌으니 개정을 거치다 보면 간호사의 업무 범위가 달라질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남는 의문이 있다. 이 법안이 하루아침에 통과된 것도 아닌데 그간 왜 반대 의견이 관철되지 못했고, 어떻게 이 법안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법은 시대를 반영해야 합니다." 간호법 관련 기사에 나온 한 간호사의 주장에 눈길이 간다. 법과 제도는 당장의 현실에서 잘 작동돼야 할뿐더러 곧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번 간호법 국면에서 간호사들은 이 점을 내세웠다. 5년 내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은 한국사회에서 돌봄 공백을 방지하고 질병구조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지역사회 의료돌봄'을 강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 간호 인력 전문화가 필요하다고 간호협회는 주장했다. 간호사들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처우가 익히 알려져 있었음에도 이 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직역 이기주의'로 비칠 여지를 최소화한 것이다. 간호법을 반대하는 주체들과의 결정적인 전략 차이가 여기에 있었다.

간호법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변화와 연결되는 또 하나의 맥락이 있다. 후기 산업사회에 접어든 노동시장의 급속한 전문직화 경향이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다양한 직종에서 중상급 지식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새 직무 영역이 열린다. 노동자들이 한 조직에 안주하기보다 자기만의 경력을 구축해 가려는 것이나, 청년세대가 유달리 일의 자율성과 '워라밸'을 중시하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일에 권한이 있어야 전문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호사는 그 업무 내용과 자격 형태로 볼 때 이미 전문직이다. 그러나 조직과 사회는 이들을 전문가로 대해 오지 않았다. '팬데믹의 영웅'으로 추어올리기도 했지만, 한때의 공치사였을 뿐 처우 개선은 미미하다. 간호사의 월평균 중위임금은 2021년 기준 294만 원에 불과하고(통계청), 40%가 야간노동을 한다(산업안전보건연구원 2020). 인당 스무 개에 육박하는 병상을 담당하는 등 고강도 노동도 잘 알려져 있다.

전문직화 경향에서 가장 중시되는, '성장' 기회도 간호사들에게는 극히 제한적이다. 질병도, 이를 다루는 의료 기술도 복잡해지고 고도화되는데 체계적 훈련이 있다 해도 받을 시간이 없다. 전문성을 높여 더 나은 일자리를 전망할 경력사다리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공식 체계에 없는 진료간호사는 합법-불법의 경계에서 위험을 감수한다. 전문직 중 이례적으로 높은 간호사의 이직률과 낮은 평균연령은 이런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대량 충원으로도 막기 어려운 재생산 위기다.

지속가능 사회를 위해 정치적, 제도적 자원을 사용한다고 할 때 우선 고려 대상은 무엇일까? 간호사들이 전문성을 높이고, 일을 지속할 여건과 동기를 확보함으로써 '지역사회 의료돌봄'의 유기적 통합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기존의 직역관계 유지를 원하는 여러 집단들 간의 기계적 균형을 맞춰 주는 것일까?


권현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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