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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경기를 지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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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사진 같고 사진이 그림 같다는 것처럼, 스포츠를 인생에 즐겨 비유한다. 치열한 삶을 돌아보며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했던 특정 연도의 한국시리즈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연승과 연패의 팀을 자신과 주변 사람에 빗대 말하길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서 스포츠란 모름지기 한 편의 인생과 같다고 한다. 승부가 치열한 거기나,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여기나, 들여다보면 다를 게 없다고 한다. 지구처럼 둥근 공이 만드는 변수와 예측불가능이 주는 재미가 여기랑 그다지 차이가 없다. “야구 몰라요”라는 고인이 된 한 해설위원의 말처럼 우리도 인생을 모른다. 그런 의식 흐름에 그라운드 안과 밖은 매끄럽게 연결된다.
암울한 적색 벽돌 검찰청이 우뚝한 서초동에서 일하다 보면 피곤함을 씻을 무언가를 갈구할 때가 있다. 퇴근 후 프로야구를 보거나 출근 전 해외 프로축구 중계를 챙겨 봐야 할 때다. 10할 타자는 존재할 수 없다. 두 번 중 한 번만 이겨라, 중간은 간다. 누구나 실수하지만 만회할 기회는 반드시 온다. 인생 선배들 조언과 다를 게 없는 그 세계 논리에 고개를 끄덕인다.
룰이 있다는 점에서도 둘은 같은 세상이구나 싶다. 룰을 어기면 심판은 휘슬을 불고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면 노란, 빨간 딱지를 꺼내 든다. 검찰과 경찰이 범법 의심자를 조사하고 판사가 주문(主文)을 낭독하는 장면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심판은 ‘그라운드 위 (재)판관’이고 경기 규칙은 판검사를 꿈꾸는 이들이 외워야 할 법전만큼 난해하고 복잡하다.
오심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거기든 여기든 억울하다는 이들은 수두룩하다. 오심의 심판은 그라운드 안에서도 밖에서도 절대 고개 숙이지 않는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을 방패막이 삼아 검은 유니폼의 권위만 내세우려 한다. “저의 잘못된 사건 처리로 상처받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는 한 고검장의 퇴임사를 쉬이 잊지 못하는 이유다. 공치사를 늘어놓는 법조인은 볼 수 있지만 과오를 털어놓은 이들을 본 적은 거의 없다.
최악은 편파 판정이다. 공정은 거기나 여기나 중요하다. "다른 걸 다르게, 같은 걸 같게"라는 평등 원칙처럼, 같은 코스 공은 똑같이 볼 또는 스트라이크여야 한다. 머리 위를 지나는 공에도 스트라이크를 외칠 수는 있다. 단, 18명 타자에게 동일해야 한다.
편파 판정이 일상일 때 세상은 아수라장이 된다. 영국의 리버풀 감독은 심판을 향해 전력 질주하다 햄스트링(다리 뒤쪽 근육) 부상을 입고,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돈 봉투 의혹 사건을 묻는 기자들에게 국민의힘 의원 이름을 뜬금없이 되묻는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투정이 합당하다 받아들여지고 삼진을 당한 선수가 야구 배트를 땅바닥에 내려쳐 산산조각을 내도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심판 콜에 인상부터 찌푸리는 선수는 꼴불견이다. 죄를 반성하기보다 휘슬 부는 심판의 의도부터 의심하는 이들은 분명 성숙한 프로가 아니다. 하지만 거기나 여기나 심판이 지배하는 경기는 이미 망한 경기다. 그러고 보니 지금 대통령도 한때는 경기를 지배하던 심판이었다. 그래서 되돌아본다. 그때 여기, 과연 정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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