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특구' 마포구, 3년 된 출판문화진흥센터를 '일자리센터'로 바꾼다고?"

입력
2023.03.27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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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의 라운지 공간에서 출판 관계자들이 책 출간과 관련한 회의를 하고 있다. 박상희 인턴기자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의 라운지 공간에서 출판 관계자들이 책 출간과 관련한 회의를 하고 있다. 박상희 인턴기자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에 입주한 뒤 센터가 제공하는 도움을 받아 1년도 안 돼 두 권의 책을 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곳 용도가 변경된다는 소식을 듣고 '마포구마저 출판을 버린다고?'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인 출판사 대표 윤여준씨)"

지난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플랫폼P·이하 센터). 경의선 책거리에 접해 있는 이 센터는 '책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으로 둘러싸인 라운지 공간에서는 편집자와 작가, 번역가, 디자이너 등이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센터는 2020년 서울시와 마포구가 출판문화·디자인분야 창업 인큐베이팅 건물을 건립하면서 개관했다. 현재 1인 출판사, 디자인 에이전시 등 출판 관련 50여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출판 심포지엄과 책과 문화 전시회, 국제 교류 프로그램 등 출판행사도 열리고 첫걸음을 뗀 '병아리 독립 출판인'에게 멘토링을 지원하기도 한다. 월 20만 원대에 사무실을 임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네트워크 구축이 용이해 출판인들의 각광을 받아왔다. 지난 3년간 출판인들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은 플랫폼P를 마포구가 용도 변경을 시도하면서 출판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센터에는 초기 출판사와 출판 관련 스타트업, 디자인 스튜디오 등이 입주해서 작업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박상희 인턴기자

센터에는 초기 출판사와 출판 관련 스타트업, 디자인 스튜디오 등이 입주해서 작업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박상희 인턴기자

개관과 동시에 선발된 1기 입주사들은 올 7월이 지나면 입주기한 만기로 퇴거해야 하는 상황. 새로운 입주사 모집 계획이 논의돼야 하는 시점이지만 마포구는 "현재로서는 결정된 사항이 없다"는 말뿐이다. 지난 연말 센터 운영 위탁 업체와 2년 8개월 계약이 만료된 후 마포구는 새로운 업체 선정을 진행하지 않고 기존 업체와 3개월, 9개월 식으로 쪼개기 계약을 연장하고 있다.

2010년 서울시는 마포구 일대를 '디자인ㆍ출판 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했고 센터 개관도 그 연장 선상이지만 지난해 구청장이 바뀐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입주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입주자는 "지난해 박강수 마포구청장이 방문한 뒤 이 공간의 일부를 비우고 스터디카페나 일자리센터를 만들려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왔다"고 말했다. 박 구청장은 지난해 도서관 예산을 삭감하면서 사실상 관내 작은도서관 폐관을 추진하려다가 홍역을 치렀던 만큼, 입주자들은 센터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이에 입주자들은 최근 '플랫폼P입주자협의체'를 결성해 플랫폼P의 출판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연대 행동을 예고했다.

지난 24일,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에서 열린 '플랫폼P입주사협의체' 창립 총회에서 센터 입주자들이 협의회를 만든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상희 인턴기자

지난 24일,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에서 열린 '플랫폼P입주사협의체' 창립 총회에서 센터 입주자들이 협의회를 만든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상희 인턴기자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에서 열린 '플랫폼P입주사협의체' 총회에서 입주자들이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박상희 인턴 기자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에서 열린 '플랫폼P입주사협의체' 총회에서 입주자들이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박상희 인턴 기자

출판은 수십 년 동안 마포구, 특히 홍익대 일대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산업이다. 최신 트렌드와 콘텐츠를 선도하는 작가들이 모여 살고 마포구 내 디자인·출판·인쇄업체의 56%(2020년 기준)가 홍대 인근에 밀집해 있다. 2010년 이후로는 근처 합정, 연남, 망원 지역까지 영역을 넓혀 곳곳에 독립서점이 생기는 등, '출판-서점-독자'가 한데 모인 대표적인 출판 집적지다. 이번 조치에 출판인들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현익 입주자협의체회장은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쌓아왔던 출판 문화 산업에 대한 로드맵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정책과 행정이 진행된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업계 종사자들이 모여 자생적으로 출판 문화를 싹 틔웠고 이를 기반으로 '자치구 특화산업'을 지원하는 정책적 근거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지자체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를 육성하고 발전시킬 책임을 구청이 방기한다는 것이다.

출판계의 비판도 잇따른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센터는 경의선 책거리와 함께 마포의 특성과 강점을 가장 잘 반영한 출판문화 육성 거점 시설로 주목받아 왔으며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지자체 소관 출판 문화 육성 시설"이라며 "지자체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용도 변경을 추진한다는 것은 스스로 경쟁력을 거세하는 탁상행정"이라 비판했다. 김수영 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은 "출판·디자인은 다른 지자체가 부러워할 만한 마포구만의 문화적 자산"이라며 "3년밖에 되지 않은 시설의 핵심 정체성을 흔들면서까지 용도 변경을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마포구는 '일자리 센터'로의 변경 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히 답하지 않고 있지만 당장 4월부터 센터에는 출판과는 무관한 구청 '청년일자리사업' 참가자 15명이 입주할 예정이다. 올여름이면 이 공간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22개팀이 퇴거하고, 빈 책상만 덩그러니 놓이게 될 터다. 출판인을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기관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혜미 기자
박상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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