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방지법' 시행 1년 반, 경비노동자들은 여전히 고달프다

입력
2023.03.16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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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아파트 경비원 투신, '인사 갑질' 호소
부당지시 근절 '공동주택관리법' 개정돼도
갑을관계 고착화 '3개월 계약' 구조는 공고

14일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A씨가 근무하던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 정문에 관리사무소장의 갑질을 규탄하는 동료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최다원 기자

14일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A씨가 근무하던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 정문에 관리사무소장의 갑질을 규탄하는 동료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최다원 기자

‘경비원 갑질 방지법’으로 불리는 법안(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이 있다. 2020년 입주민의 폭행, 폭언 등 ‘갑질’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파트 경비노동자 최희석씨 죽음을 계기로 이듬해 10월부터 시행됐다. 경비원들이 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의 구분을 명확히 해 갑질 피해를 줄여보자는, 한국 사회 을(乙)들을 보호하는 법 중 하나다. 시행 1년 반. 을의 사정은 좀 나아졌을까.

14일 서울 강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70대 경비원 A씨가 투신해 숨졌다. 그는 왜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단서를 남겼다. 유서 격인 호소문에서 고인은 생전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의 모욕적 언사 탓에 괴로웠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동료들도 신임 소장의 인사 갑질을 이구동성 증언했다. 그의 죽음이 부당한 지시 때문인지는 경찰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분명한 건 아무리 법을 바꿔도, 경비노동자가 철저히 약자인 고용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비극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점이다.

관리소장 비판하고 숨져... 경찰, 위법 여부 수사

15일 본보가 만난 해당 아파트 경비원들은 지난해 12월 새 소장 B씨가 부임하면서 괴롭힘이 시작됐다고 입을 모았다. 한 경비원은 “신임 소장은 1월에 A씨를 경비반장에서 일반 경비원으로 강등시키려 했다”며 “10년간 중간 관리자급이었는데 말단으로 보내는 건 제 발로 나가라는 뜻”이라고 목소리를 냈다. 실제 A씨는 부하 직원의 사소한 실수를 이유로 이달 8일 일반 경비원이 됐다. 또 다른 경비원도 “많은 사람이 모인 정례회의에서 B씨가 고인에게 ‘지시사항을 복명복창하라’며 모욕을 줬다”고 말했다.

A씨만 정신적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한 경비원은 “공고 기한이 지난 게시 글을 실수로 내리지 않았는데, 경비대장을 통해 시말서를 쓰라는 지시가 내려와 ‘고용노동부에 문의하겠다’고 하니 없던 일이 됐다”고 황당해했다. B씨가 “주민들이 경비원들의 희끗한 머리를 보기 싫어하니 검은색으로 염색하라”고 지시했다는 전언도 나왔다. 이 아파트 주민은 “지금까지 주민과 경비원들이 큰 문제없이 지냈는데, 최근 부쩍 그만두는 분들이 많아 의아했다”면서 안타까움을 표했다.

B씨 측은 부적절한 업무 및 인사 지시는 일절 없었다고 부인한다. A씨를 강등한 조치 역시 고인이 먼저 “(반장 일이) 힘들다”며 요청했고, 이달 재차 같은 의사를 밝혀 이동시켰다고 주장했다. 동료 경비원들의 증언도 “과장과 왜곡”이라고 반박했다.

갑질 초래 '초단기 계약' 관행부터 바꿔야

14일 극단적 선택을 한 아파트 경비원 A씨가 근무하던 경비 초소. 최다원 기자

14일 극단적 선택을 한 아파트 경비원 A씨가 근무하던 경비 초소. 최다원 기자

경비노동자들을 둘러싼 갑질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근본 원인은 3개월~1년 단위로 맺는 ‘초단기 계약’에 있다. 갑질 방지법을 시행해도 업무 범위만 뚜렷이 정해졌을 뿐, 초단기 계약 행태는 변하지 않았다. 대부분 아파트는 입주자대표회의가 관리사무소ㆍ경비용역업체와 계약하는 형태다. A씨가 근무한 아파트도 최근 경비용역업체가 변경된 뒤 경비원들과 3개월짜리 근로계약을 새로 맺었다.

입주자가 ‘갑’, 관리사무소는 ‘을’, 용역회사는 ‘병’, 경비원은 ‘정’이라는 비아냥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돌려 말하면 경비원에게 갑질할 주체는 입주민만이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김시운 서울노동권익센터 노무사는 “관리소장의 업무 범위를 정한 공동주택관리법 규정이 모호한 것도 문제”라며 “소장은 경비원들에 대한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통계를 봐도 서울노동권익센터에 접수된 경비원 권리구제 관련 상담 건수는 2021년 428건에서 지난해 1,004건으로 외려 크게 늘었다. 이 중 징계ㆍ해고ㆍ인사와 관련된 신고가 159건으로 근로시간ㆍ휴일ㆍ휴가ㆍ휴직(221건) 다음으로 많았다. 임득균 노무사는 “경비는 기간제법의 예외사항인 ‘만 55세 이상 고령 노동자’가 많아 계속 기간제 근무자로 계약할 수 있다”며 “이런 불합리한 구조부터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다원 기자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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