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하다

입력
2023.03.11 04:30
10면

<109>주 60시간 이상 노동?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하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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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몇 시 몇 분에
날마다 알리바이를 만들 이유도 없건만
착신음이 울리면
곧바로 휴대전화를 듭니다.
...조난을 당했을 때 구조될 확률은 높겠지만
배터리가 다 되거나 통화권 밖이라면
절망은 더 깊어지겠죠.

이바라기 노리코 '행방불명의 시간', 성혜경 옮김, 『여자의말』


이바라기 노리코라는 일본의 여성 시인이 있다. 나이 오십이 되어 한국어를 배우고 윤동주의 시를 사랑해 그에 대해 글을 쓰기도 한 그녀는 '행방불명의 시간'이라는 시에서 현대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편리함이 만들어내는 역설적 효과를 이같이 위트 있게 드러냈다. 스마트폰 없이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 현대인은 평소에는 시도 때도 없이 연결되느라 시간 빈곤을, 연결 바깥에 놓이게 될 때는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일상을 산다.

정보기술(IT) 강국의 이미지와 자부심이 강한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2010년대 중반부터 빈번하게 보고된 IT 업계의 과로사는 이런 일상이 노동 관리 기술과 결합하여 강도 높게 지속될 경우 노동자들의 육체가 쉽게 죽음으로 내몰린다는 것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였다. 2018년 시작된 '주 52시간제'나 지난해 업무 시간 외 카톡 금지법 발의는 이런 상황이 당연하지 않다는 대중들의 경험과 인식이 제도화된 결과였다.

노동 시간 변화의 역사

흥미로운 것은 한국 근로기준법의 주당 근로 시간 규정이 이미 1953년 주 48시간, 1989년 주 44시간, 2003년 주 40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2000년 노동부의 '1주일'에 대한 행정 해석이었다. 당시 노동부는 1주일에 주말인 토·일요일을 제외하는 꼼수를 부렸다. 이렇게 하여 주중 5일 근로시간 40시간에 당사자 합의를 통해 가능한 12시간의 연장근로, 토·일요일 휴일근로 각 8시간을 합쳐 주당 68시간 근로가 허용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엄밀히 보면 2018년 개정 근로기준법이 규정한 것은 '주당 52시간 근로를 허용한다'가 아니라 '1주란, 휴일을 포함한 7일을 말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정의였다. 그래서 노동시간과 젠더 정치를 연구해온 국미애 박사는 2018년 이후 '주 52시간제'로 불려온 주당 근로 시간 규정을 '주 52시간 근무 상한제'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당 52시간은 연장 근로를 포함한 최대치라는 것이다.

노동 시간을 둘러싼 이와 같은 변화의 역사를 보면 윤석열 정부가 새로운 명분으로 내세우는 '연장근로 총량관리 유연화'가 전혀 새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도입된 유연근무제는 노동시간과 장소에 대한 노동자의 재량권을 높이지 않으면 고용 불안정만 증대시킨다는 것이 이미 많은 연구에서 드러났다. 그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주 60시간 이상 노동을 시켰던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관성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민주노총이 9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노동시간 개악 저지 윤석열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과로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민주노총이 9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노동시간 개악 저지 윤석열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과로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장시간 노동 체제가 만드는 남성성과 여성성

학자들은 이런 긴 노동 시간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 특유의 노동 및 시간 관련 제도와 문화를 '장시간 노동 체제(working time regime of long hours)'라고 부른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 체제는 19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부터 본격화한 수출 중심의 산업화를 떠받친 두 축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었다. 정부나 재계뿐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장시간 노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몸에 익은 일종의 관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에서의 남성됨과 여성됨의 제도와 문화,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장시간 노동자=성인 남성=가장(생계부양자)'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과 문화, 이에 기반한 혹은 이를 강화하는 각종 제도,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해마다 조사하는 회원국의 성별 1일 평균 노동시간은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이 성별로 어떻게 다르게 배분되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 표에서 볼 수 있듯 여성의 무급노동 시간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길고, 남성의 유급노동 시간이 여성의 그것에 비해 긴 것은 한국이나 다른 OECD 회원국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나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무급노동 시간의 성별 차이다. 이 지면에서 한 차례 다뤄진 바 있듯 (2022년 8월 27일자 젠더살롱 <84> '집'에서 일하지 않는 남성에게도 재생산노동을) 한국 남성의 무급노동 시간은 짧고, 여성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OECD 회원국 중에서 한국 남성보다 무급노동을 짧게 하는 국가는 일본뿐이며(40.8분) 한국 남성의 무급노동 시간이 중국(91분)과 인도(51.8분)보다 짧다는 점도 흥미롭다.

또한 평균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하루에 16.4분 더 일하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남성의 유급노동 시간과 무급노동 시간의 차이는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극단적이다. 이 표는 남성이 유급노동을, 여성이 무급노동을 맡아 한다는 기계적이고도 조화로운(?) 그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지 않는 노동은 존중받지 못 하며 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 표는 한국에서 노동과 그를 통한 자원 및 권력 획득이 남성에게 극단적으로 집중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그림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무급노동은 대부분 타인을 돌보는 성격을 띠기에 노동의 과정에서 관계를 맺고 유지하며 감정을 쓰게 된다. 인간이란 홀로 존재할 수 없음에 대한 깨달음을 수반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하여 무급노동을 할 겨를이 없는 한국 남성은 돈은 되지 않지만 친밀한 관계를 형성, 유지하고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보살피며, 그를 통해 더 나은 삶, 더 정의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많은 일들에 동참하지 못한다. 그럴 시간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런 '전형적'인 남성에 속하지 않는 남성들은 자원과 권력의 외부에 있게 되니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여성은 어떠한가. 한국 여성은 무급노동과 유급노동을 오가며 자원과 권력 획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온갖 일을 도맡아하면서 자긍심을 잃어 간다. 집과 사회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자신의 자리를 찾아 헤매느라 역시 자아를 넘어선 더 큰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키기 쉽지 않다. 그럴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유급노동을 당연시하는 현대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것은 이 표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우리에겐 때때로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하다

6일 서울 중구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구인 공고가 붙어 있다. 뉴스1

6일 서울 중구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구인 공고가 붙어 있다. 뉴스1

매년 OECD 국가들 사이에서 수위를 다툰 한국의 유급노동 시간이 웬일인지 2022년에는 멕시코,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칠레에 이어 38개국 중 5위로 내려앉았다. 늘어난 공휴일, 5~29인 사업체 근무 노동자의 공휴일 사용, 코로나19로 인한 격리자 증가, '주 52시간제' 시행과 같은 다양한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인 것 같다. 이 와중에 노동자들을 반드시 주 60시간 이상 일하게 만들겠다는 이 정부의 고집은 과거 회귀적일 뿐 아니라 안 그래도 심각한 젠더 이슈를 더 꼬이게 만들 것이다. 한국일보 2월 27일자 사설(2030 여성 4%만 '결혼·출산 필수'라는 사회)이 예리하게 지적했듯 한국이 당면한 초유의 저출산은 긴 유급노동 시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간과 에너지가 없는데 누구를 어떻게 만나 함께 아이를 낳고 기르겠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서두에 언급한 시 '행방불명의 시간'에서 시인은 "인간에게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그 시간은 타인에게서 벗어나는 시간인 동시에 시인에 따르면 "문득 자신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타인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마저 지우는 우주적인 시간, 때때로 그런 시간들을 가진 뒤에야 우리는 다시 타인과 마주하고 생명을 품으며 더 나은 삶과 사회를 궁구(窮究)할 수 있으리라. 이번 주말,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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