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선과 고아인

입력
2023.02.22 16:00
26면
구독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드라마 '일타 스캔들'의 주인공 남행선 역을 맡은 배우 전도연과 최치열 역의 배우 정경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드라마 '일타 스캔들'의 주인공 남행선 역을 맡은 배우 전도연과 최치열 역의 배우 정경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드라마 ‘일타 스캔들’과 ‘대행사’가 지난 주말 나란히 시청률 13%대를 기록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둘 다 여성이 주인공인데, 극 중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달달한 러브 라인을 응원할지, 통쾌한 복수에 박수를 보낼지는 물론 시청자의 몫이다. 다만 두 드라마 모두 공식처럼 뻔해 보이는, 과거의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를 들이미는 것 같아 썩 달갑지만은 않다.

□ 남행선은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를 포기하고 국가대표 반찬가게를 열었다. ‘손맛’이 좋아 핸드볼만큼이나 요리도 잘한다. 드라마를 잠시만 봐도 행선이 처한 상황과 성격이 쉽사리 짐작된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여느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밝고 착하고 억척스럽다. 때론 엉뚱한 매력도 발산한다. 그래야 돈 많고 인기도 많은 일타 강사 최치열의 마음을 얻는다는 스토리가 완성된다. 스캔들을 터뜨리는 데 이어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인물까지 나타났으니 행선을 신데렐라, 치열을 왕자로 바꿔도 별 무리 없어 보인다.

□ 고아인은 광고대행사 VC그룹의 첫 여성 임원 타이틀을 꿰찼다. 유리천장을 깬 듯 보이지만, 아인을 발탁한 건 회장 딸을 낙하산으로 임원 자리에 앉히려는 회사의 전략이다. 왕자 따윈 필요 없을뿐더러 윗사람에게도 광고주에게도 할 말 하는 사이다 캐릭터라 속이 시원해지다가도, 늘 무표정에 차가운 말투로 일밖에 모르고 성과 압박에 약으로 버티는 모습은 여성이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아직도 저 정도는 돼야 한다는 얘긴가 싶다. 회장 딸과 손잡고 위기를 넘는 전개가 극적이긴 한데, 굳이 남녀 대결로 그린 구도는 아쉽다.

□ 최근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확대되고 있는 파격 시도가 그래서 더 눈길을 끈다. 극 중 남성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여성 캐릭터를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이른바 ‘젠더 프리’ 캐스팅이다. 여자 살리에리(모차르트의 라이벌)나 여자 데미안은 낯설지만, 뻔하지 않은 입체적인 인물을 기대하게 만든다. 배우 한 명이 성별과 무관하게 여러 인물을 바꿔가면서 연기하는 ‘캐릭터 프리’ 캐스팅도 의미 있다.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대중문화 전반으로 더 확산되길 바란다.

임소형 논설위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