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 '만약'은 없다

입력
2022.12.1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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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 진출 성적을 거둔 파울루 벤투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인터뷰를 마치고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 진출 성적을 거둔 파울루 벤투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인터뷰를 마치고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9전 전승 우승 신화를 창조한 야구는 감동이었다. 하지만 매 경기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던 야구인이나 기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당시 김경문 야구대표팀 감독은 야구 상식과 정설을 깬 파격 용병술로 승부를 걸었다. 축적된 데이터 대신 감(感)에 의존한, 누가 봐도 위험천만한 선수 기용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주의 기운이 한국에 왔는지 김 감독의 투수 교체, 대타 기용은 작두 탄 것 마냥 족족 맞아떨어졌다. 김 감독 스스로도 훗날 “내가 봐도 무모한 선택이 많았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세상사 ‘만약’은 없다. 결과로 말하는 스포츠에선 더욱 불필요한 논쟁이다. 김 감독은 국민적 영웅이 됐고, 그 길로 승승장구해 프로야구에서도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때 김 감독의 용병술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지금도 없다. 그저 한국 야구 올림픽 사상 최초의 금메달 감독으로 기억될 뿐이다.

카타르 월드컵도 막바지다. 이태원 참사 여진으로 흥을 내기도 조심스럽고, 눈치도 보였는데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온 국민이 하나 됐으니 월드컵의 신묘한 힘이다. 그런데 ‘만약’ 16강 진출에 실패했다면? 우리는 과연 파울루 벤투 감독을 칭송했을까? 4년간 빌드업 축구를 밀어붙인 벤투의 뚝심은 고집으로 둔갑했을 것이며 이강인의 교체 타이밍은 신의 한 수가 아니라 투입 시기를 놓친 악수로 도마 위에 올려졌을 것이다.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트레이너의 폭로 역시 16강 실패 뒤였다면? 개인 트레이너와 대한축구협회 의무팀의 갈등 구조가 낱낱이 파헤쳐졌을 것이며 언론은 한국 축구의 해묵은 숙제들을 들춰내기에 혈안이 됐을 터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1차 목표를 이룬 한국은 세계 최강 브라질과 만난 16강전에서 전반에만 4골을 내줬다. 제발 더 실점하지 말고, 한 골이라도 따라붙기를. 조별리그 3경기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했다. ‘만약’ 5골 차 이상의 기록적 참패를 당한다면 16강이라는 대업마저 퇴색될 거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BBC의 축구 분석가로 활동 중인 ‘인간 문어’ 크리스 서튼의 “이건 8-0이었을 수도 있고, 그랬어야 했다”던 끔찍한 평가를 반박하기 어려운 일방적인 경기였다. 다행히 1-4로 선방했다. 온라인엔 '전반에 네 골 먹었으면 정신력이 흔들렸을 텐데 끝까지 죽을 것처럼 분위기 바꾼 게 바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후반전만 보면 우리가 1대 0' 등 지지의 글이 올라왔다. 어쩌면 3점 차 패배는 해피엔딩의 여운을 이어갈 수 있는 심리적 마지노선은 아니었을까.

지난해 도쿄 올림픽을 기점으로 성적 지상주의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건 사실이지만 스포츠에서 결과를 떼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졌을 때, 실패했을 때, 1등을 못 했을 때 끝없이 따라붙는 ‘만약’은 위험하다. 처절한 반성과 냉철한 분석을 위한 복기는 필요하지만 비난을 위한 ‘가정법’이 성립되어선 안 된다.

벤투 감독이 4년 3개월간의 여정을 마치고 13일 한국을 떠났다. 그는 재임 기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16강이라는 ‘결과’를 내면서 다행히 모든 ‘만약’을 잠재우고 아름답게 퇴장할 수 있었다.

성환희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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