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를 걸고서라도

입력
2022.11.17 22:00
27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스틸컷. 워터홀컴퍼니(주) 제공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스틸컷. 워터홀컴퍼니(주) 제공

사회적 갈등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 온 역사 내내 있었지만, 어쩐지 그것은 차근차근 논의되기보다 점점 빨리 처리되기 급급한 것만 같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많은 대화가 필요한데, 대화는 줄어든다.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은 빠르게 편을 갈라서 상대를 제압해야 할 싸움으로 변해 버린다.

갈등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서로에게 좀 더 친절해지자고, 다정해지자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순진해 보인다. 다정함은 너무나도 상투적이라서 힘을 잃은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의 하중을 젠더 갈등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요'라고 말하는 무책임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워낙 독특한 영화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그 안에서 나는 이 영화가 말하는 '다정함'이라는 메시지에 좀 더 관심이 기운다. 영화는 미국에서 빨래방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중국인 이주자 가족이 세무조사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는 대화와 사랑이 부재한 부부 관계를 고민하며 이혼 서류를 챙기고, 딸 조이는 자신과 여자 친구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해 주지 않는 어머니에게 화가 난다. 그 와중에 에블린은 자신의 삶과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아버지의 건강까지 챙겨야 한다.

세무조사를 받으러 가던 중, 에블린은 다른 우주의 웨이먼드를 만나게 되고, 우주를 파괴하려는 악당이 자신을 노리고 있으며, 그 악당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우주의 에블린은 자신의 딸을 극한으로 훈련시켰고, 그 부작용으로 결국 그가 모든 우주를 동시에 경험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모든 경험을 한 번에 하게 된 조이는 어떤 것도 부질없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극도의 허무 안에서 윤리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그는 모든 우주에서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기 시작한다.

이 악당과 싸우고 있는 다른 우주의 사람들은 에블린을 이용하여 악당을 죽이려 하지만, 에블린은 어떻게든 자신의 딸을 지켜내려 고군분투한다. 자신의 고군분투가 몇 개의 우주를 망치건 간에. 그리고 조이를 물리치려는 이들과 조이를 지키려는 에블린이 싸우는 상황에 영문도 모르는 이 우주의 웨이먼드는 목숨을 걸고 다정함을 외친다.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건 간에.

영화는 이것이 그저 순진한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갈등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기 위해 내뱉는 쉬운 다정함이 아니다. 아무리 편을 갈라서 싸워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자신이 맞다는 확신에 가득 찬 이들의 싸움이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할 때, 우리는 사실 그 싸움 자체가 갈등을 해소하기보다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분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목표를 잃은 싸움.

이때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은 다정함일 수밖에 없다. 다정함은 그 모든 갈등을 잠깐이나마 멈추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렇게 순진한 해결책, 사랑하자는 말, 다정하자는 말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을 걸고 싸워서 지켜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온 우주를 희생시킬지도 모를, 멋모르는 각오를 하고서라도 사랑을, 다정함을 지켜내야만 한다. 절박하고도 어려운 다정함을 말이다.


이지영 한국외국어대 세미오시스 연구센터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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