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모할머니와 이야기보따리, 그림책

입력
2022.10.05 21:00
25면

이재연 지음,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내가 제삿날을 기다린 이유는 그날에야 당고모할머니가 오시기 때문이었다. 먼 데서 제사를 보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비좁게 모여 자야 하는 그날 밤에 "집안이 작으니 나라도 올 수 있을 때까지 와야 한다"며 꼬박 하루를 걸어야만 하는 먼 거리에서 오시는 할머니에게서 옛날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불도 끄고 이불을 끌어당겨 당장 이불속으로 숨을 태세를 갖추고, 도깨비를 만난 일이며 죽어서 3일 동안 황천을 헤매다 살아온 사람의 사후세계 경험담 등을 온 신경을 세우고 듣고 들었다. 할머니가 "이제 자자, 더 할 얘기가 없어" 하시면 "변소귀신 빨간 손 이야기 또 해주세요" 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또 청해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다시는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나이가 든다고 누구나 이야기꾼이 될 수 있는 게 아닌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머릿속에 맴맴 돌지만 나도 들은 이야기를 전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그게 내가 책방을 열게 된 이유가 될 것이다. 이야기가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전해지고 연결되는 그런 공간, 물성을 '접촉'하여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그런 시간에 대한 미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꼭 맞는 책을 만났다. 돌아가신 당고모할머니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책.

"들판 신작로 길을 가면 까만 고무신이 화장한 것처럼 뽀얘졌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아버지가 들으시는 라디오도 전지약을 한 뭉치 등에 업고 있었다."

이런 문장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으려나?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50대인 나는 그냥 확 이해가 된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그림으로 꼼꼼히 그려두었다. 그림을 그리자 기억이 마구 솟구쳤다고 한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으니 솟구친 기억을 어떻게 온전히 그려낼 수 있었겠는가. 도서관 그림 동아리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였고 김홍도 풍속화를 따라 그리며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그 시작이 70세를 넘긴 후였다 한다. 책 내용과 별개로 작가의 '살아감' 이야기도 참으로 감동을 준다. 70세가 넘어 처음 드로잉을 하고 즐거움에 빠지고 덤으로 명성을 얻고 다른 할 일이 생각나고 남들을 행복하게 하여 나의 나날이 기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나도 이 나이면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준다. 그냥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남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옛 어른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무엇이 아름다운 일인지 은연중에 전해주었다. 그것은 안개 속 등대처럼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당고모할머니의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그랬다. 온갖 지식과 지혜가 쌓여 있는 책방에서 개인의 유년기억을 투박한 그림으로 전하는 책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가 빛나는 이유도 그렇다. 이 책은 직전 세대의 풍속화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지식이 들어있어서 혼자서는 볼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니 할머니, 할아버지께 이 책을 선물해 보시라. 그리고 그림이 무슨 장면인지 설명해달라고 요청해 보길 권한다.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보따리가 열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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