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에티오피아 커피가 일깨운 스토킹 범죄

입력
2022.09.21 00:00

청년하다를 비롯한 대학생·청년 단체 회원들이 19일 서울 중구 신당역 앞에서 신당역 여성노동자 스토킹 살해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이 글을 쓰는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20일 새벽 5시다. 지금 나는 베를린 워케이션(일(work)과 휴가(vacation)를 합한 말) 프로그램을 위해 독일로 가는 중이다. 높은 항공료 때문에 직항 대신 경유를 택해 짧은 기간 여러 나라를 거쳐 가고 있다. 그 첫 나라가 에티오피아다. 긴 환승 대기 시간을 걱정했는데, 항공사에서 호텔 바우처를 제공해주어 잠시 공항 근처 호텔에서 쉬고 있다.

코로나 이후 처음 나오는 해외 일정이라 설렐 만한데 마음이 무겁다. 비행기 창문에 비친 나를 보니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혀있다. 지난 14일 발생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일어난다. 자신이 원하는 만남을 갖지 못했다고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집요하고 잔인했던 스토킹 폭력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방법은 정말 없었을까?

왜 법원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처음 고소했을 때 구속영장을 기각했을까?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기각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가해자가 피해자의 삶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는 증거는 차고 넘쳤는데 말이다. 왜 경찰은 피해자가 두 번째로 가해자를 고소했을 때, 영장조차 신청하지 않았을까? 스토킹처벌법 위반, 성폭력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이 징역 9년을 구형할 만큼 가해 행위가 명백했는데도 말이다.

왜 법무부는 작년 스토킹처벌법 입법 당시, 정부안으로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기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를 제안했을까? 그 안이 통과될 경우, 가해자가 합의 종용을 목적으로 피해자를 더 집요하게 괴롭힐 수 있다는 우려가 계속 제기되었는데도 말이다.

왜 국회는 정부안을 그대로 통과시켰을까? 지난 4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힘겹게 회부된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에 대해, 이번 비극이 일어나기 전까지 왜 논의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동안 최소 4명의 여성이 스토킹 범죄로 인해 목숨을 잃었는데도 말이다.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여러 가지 폭력적인 대응을 남자 직원이 한 것 같다"라는 말을 어떻게 시의원이라는 공직을 수행하는 사람이 할 수 있었을까? 비판받기 전까진 이 생각이 잘못된 줄을 정말 몰랐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만 이 시의원만일까? 다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왜 법원은, 정부는, 국회는, 정치인은, 피해자가 당하는 고통에는 엄격하고, 가해자가 행하는 폭력에는 관대할까? 왜 법을 바꾸고 집행할 힘을 가진 존재들이 피해자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면서, 가해자가 받는 비판에는 예민하게 반응할까?

호텔 로비 한구석에 앉아, 이 질문들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호텔 직원이 다가와 에티오피아 전통 커피라며 커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직원들끼리 식사 후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었는데, 왠지 커피를 나눠 마셔야 할 것 같았나 보다. 깊고 진한 커피 맛에 커피를 잘 모르는 나도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러다 문득 피해자가 커피를 참 좋아했다는 기사가 생각이 났다.

어쩌면 피해자도 나처럼 우연이라도 커피로 유명한 이곳 에티오피아에 들러, 내가 마신 커피를 맛볼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속에서 무엇이 훅 올라왔다. 피해자도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를 다시는 마실 수 없게 한 이와 같은 비극을 여기서 끝내지 못한다면, 그건 나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김경미 섀도우캐비닛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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