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을 낭만화하는 남자들

입력
2022.09.19 22:00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 화장실에서 20대 동료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전 모씨가 16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범죄화되기 전까지, 스토킹은 남자다움의 행동 지표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처럼, 구애의 적극성으로 포장하고 거기에 낭만성까지 부여했다. 스토킹을 자랑스러운 구애로 노래한 대중가요도 여럿 있다. 나 역시 이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적이 있음을 부끄럽게 고백한다. 신당역 살인 사건 후 더불어민주당 이상훈 서울시의원은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까 여러 폭력적 대응을" 하게 된 것이라는 망언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발언에 손가락질했지만, 지금도 이런 생각이 상당수 남자들의 평균적 인식이다.

스토킹 처벌법이 만들어진 건 불과 1년 전이다. 1999년 처음 발의됐으니, 국회 문턱을 넘는 데 20년 이상이 걸렸다. 스토킹은 여성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는 명백한 폭력 행위다. 이 기준선 하나 긋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토킹 처벌법으로 우리는 이 사회에 만연한 남성 권력적 시선을 또 하나 해체했다. 이런 변화는 남성들이 자발적으로 깨달아서 이뤄진 게 아니다. 여성들이 힘겹게 쟁취한 것이다. 아직도 업데이트 안 된 남자들이 "이제 구애도 마음대로 못 하겠네"라는 멍청한 소리는 하지 않길 바란다. 정중하게 하고, 거절당하면 정중하게 돌아서면 된다. 여성들은 당신들 감정의 일방 통행로가 아니다.

범죄적 스토킹이 아니더라도, 여성이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는데도 '들이미는' 연성의 스토킹은 여전히 많다. 남자들은 그게 남성 권력적 시각에서 저지르는 일임을 잘 모른다. 여성 뮤지션을 대할 기회가 많은 나는 현장에서 수시로 이런 파렴치를 목격한다.

신당역 살인 사건은 이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를 총체적으로 보여줬다. 가해자는 N번방 사건처럼 불법 촬영물로 협박까지 하고, 음란물 유포로 처벌받은 동종 전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속 영장이 기각됐다. 영장 기각 사유로 가해자가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점이 참작됐음이 알려졌다. 전형적인 '큰일 하는 남자' 이데올로기다. 코넬대 케이트 만(Kate Manne) 교수는 이를 '힘퍼시(himpathy)'라고 명명했다. 남성을 뜻하는 him과 공감을 뜻하는 sympathy를 합친 말이다. 능력 있고 힘 있는 가해자 남성에게 동조하는 비합리적 편견을 이르는 것이다. 안희정, 박원순 사건 때 힘퍼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피해자가 2차 고소를 했을 때 경찰은 "앞으로 연락하지 않겠다"는 가해자의 말만 믿고 영장 청구조차 하지 않았다. 지하철공사 동료들은 가해자가 고소당한 사실을 전해 듣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두둔했다고 한다. 판사는 가해자의 사정에 기울고, 경찰은 가해자의 말을 순순히 믿고, 회사 동료들은 가해자를 온정으로 감쌌다. 차별의 구조는 노골적이지 않고 이처럼 은근하고 단단하게 엮여 있다.

낮은 성인지 감수성에 기초한 판사의 편견, 경찰의 안이함, 주변의 평범한 동료들의 두둔, 이것들의 총합이 이번 범죄의 배후다. 그들은 350회나 스토킹당한 피해자의 절박한 입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여성을 성적 소유물로 여기는, 스토킹을 남자다움으로 착각한 그 이데올로기다. 스토킹이 얼마나 비열한 짓인지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사회였다면, 이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정신적 결함이 있는 한 범죄자의 소행으로만 보기 힘든 이유다. 성범죄는 감시와 처벌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모두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과 나 역시도 언젠가 성범죄의 평범한 공범이 될 수 있다.


이주엽 작사가·JNH뮤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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