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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겸손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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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생애 대부분을 여왕으로 살았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인 아버지 조지 6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25세인 1952년 2월에 즉위했다. 이듬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은 세계에 처음 TV로 중계된 행사였다.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TV시대 개막을 알린 사건이 여왕 대관식이었다. 눈부신 금발 소녀가 전후 지쳐가던 영국의 자존심이자 상징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방 때 호주에서만 인구 절반 이상이 여왕을 보기 위해 모였다.
□ 즉위 후 첫 총리 윈스턴 처칠은 “큰 전투에서 참패하면 의회는 정부를 교체하지만 승리하면 군중은 여왕에게 찬사를 보낸다”고 말했다. 권력은 없지만 영광은 여왕의 몫이었다. 그러나 영광이 유산처럼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왕이 70년 넘도록 국민 지지를 잃지 않고 존경받는 지도자로 남은 데는 특유의 리더십이 있었다. 여왕의 힘은 자신을 낮추고 국민을 앞세우는 겸손에서 나왔다. 전기작가 샐리 베덜 스미스는 겸손의 리더십이 국민의 마음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 언론과 대중의 뜨거운 관심에도 여왕은 화려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극장에 갈 때는 알리지 않고 객석 조명이 꺼진 뒤 입장했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흔들림은 없었다. 동갑내기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 언론은 영국에 두 명의 여왕이 있다고 했다. 대처가 영국을 더 구현하는 슈퍼스타가 되어갈 때 여왕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비쳤지만 자신을 잃지 않았다. 여동생 마거릿 로즈는 “여왕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겸손했고 오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 여왕은 점점 국민에게 엄마, 할머니 같은 존재가 되었고 국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인물로 자리했다. 여왕의 진정한 업적은 그렇게 해서 지켜낸 브리타니아의 구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왕이 일정 봉합해온 전후 제국의 유산 문제는 벌써 고개를 들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선 영국의 과거 잔학성에 대한 비판이, 호주 인도에서는 영연방 군주제에 회의론이 제기됐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분리 움직임은 영국의 정체성을 흔들고 있다. 새 국왕 찰스 3세가 어머니의 많은 유품 가운데 무엇을 상속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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