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 쥐고 상경해 사업가 된 IQ 80 고아의 '인생역전', 추석 소망은?

입력
2022.09.09 17:00
수정
2022.09.1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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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 출신 브라더스키퍼 김성민 대표
굶주림·구타 '지옥' 같은 보육원 생활
고교 졸업 후 5만원 쥐고 상경·6개월 노숙
'돈 벌게 해줄게' 검은 유혹 뿌리치고 식당일
NGO서 보호아동 후원·자립준비 도와
"후원 끊기면 범죄, 취업해도 금방 관둬
자립준비청년 상처 치유가 먼저 깨달아"
"식물 키우면서 정서 회복 촉진시켜
2018년 사업으로 확장, 사회적기업 인증"
"직원 10명 중 8명이 자립준비청년
지각·결근에 일 서툴러도 1년 기다려줘
이탈자 거의 없이 직장생활 안착"
"추석 때 자립준비청년들과 대면 모임
어른도 부모 필요, 부모님 꼭 찾고 싶어"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 브라더스키퍼 제공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 브라더스키퍼 제공

'대표의 급여는 가장 월급을 많이 받는 직원의 급여를 넘지 못한다', '무단결근해도, 사고를 쳐도 적응하도록 적어도 1년은 기다려 준다', '공개채용은 하지 않는다(필요할 때만 알음알음 채용, 그러니 탈락자도 없다)', '직장 동료는 가족이자 식구, 워라밸보다는 워크앤홈(work and home)'.

경기 안양에 있는 사회적기업 '브라더스키퍼(brother's keeper)'의 경영 방침이다. 원 10명 중 8명이 '자립준비청년'이라는 특성을 감안했다. 만 18세가 되면 보육원이나 위탁가정의 양육(보호)이 종료돼 혈혈단신으로 정글 같은 사회에서 홀로서기 해야 하는 자립준비청년들을 17년간 돌봐온 김성민(37) 대표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자립준비청년들은 부모에게 버림받고, (원하든 원치 않든) 범죄에 휘말린 경험도 적지 않다. 이미 여러 차례 아픔을 맛본 이들에게 성과가 있으면 함께 나누고, 직장에 잘 적응하고, '탈락'이라는 또 다른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가족처럼 지내자는 취지다.

벽면녹화를 비롯한 식물인테리어 및 조경서비스를 사업화한 이유도 특별하다. 최근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등으로 관심이 높아진 영향도 있지만, 식물을 가꾸면 정서 치유에도 좋기 때문에 상처가 깊은 자립준비청년들에게 큰 도움이 돼서다. 회사 홈페이지에도 '사람을 구하고, 자연을 살린다(save people and save nature)'는 문구와 함께 "자아실현과 성장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함께 일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일한다"고 소개했다.

그의 경영 방식은 직원들에게 자신감과 자존감, 애사심을 키워줘 자립의 밑거름이 됐다. 김 대표와 직원들은 서로 가족이 됐다. 위기에도 끄떡없었다. 지난달 30일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해 문을 닫을 뻔한 상황에 몰려 정말 힘들었는데, 가족처럼 지내온 직원들이 함께 버텨줘 다행히 1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며 "매년 흑자를 내고 있고, 올해는 매출이 2, 3배가량 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지난달 광주에서 벌어진 자립준비청년들의 잇따른 비극을 언론보도로 접하고서는 정말 가슴 아팠고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김 대표 역시 보육원 출신 자립청년이어서 벼랑 끝에 선 이들의 아픔을 잘 알아서다. 그는 "저도 17년간 지냈던 보육원을 퇴소하며 단돈 5만 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었다"며 "(극단적 선택을 한 청년들이) 얼마나 막막했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3가지를 꼭 당부했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자라야 하기에 가정을 잃은 어린이는 ①가정위탁 양육이 우선이고, 어쩔 수 없이 보육원에 가야 한다면 아이들 심리상태까지 살피는 양육을 고려한 ②교사 1인당 담당 아동인원 축소 등 처우 개선, ③보호종료 후에는 부모 역할을 해줄 가정과 연결해주는 '사회적 가족제도' 도입이다.

이 제안들 역시 '지옥' 같았던 보육원 생활, 보육원 퇴소 후 6개월간의 노숙, 보호아동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하면서 겪은 시행착오 등 평범하지 않은 37년 인생 경험 끝에서 얻었다. 사업가로 성장하며 드라마틱한 '인생역전(반전)'을 일궈낸 김 대표에게서 어떻게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진솔한 얘기를 들어봤다.

지옥 같은 보육원, 불신과 경계심

김성민(위에서 세 번째) 브라더스키퍼 대표가 어릴 적 보육원에서 생활할 때 모습. 브라더스키퍼 제공

김성민(위에서 세 번째) 브라더스키퍼 대표가 어릴 적 보육원에서 생활할 때 모습. 브라더스키퍼 제공

김 대표의 주민번호는 '85'로 시작한다. 올해 만 37세라는 뜻이나 확실하지 않다. 1987년쯤 경북 안동의 한 보육원에 맡겨졌을 때 이름과 주민번호 같은 최소한의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발육 상태로 봐 세 살 정도로 추정돼 보육원이 동사무소에 그렇게 출생 신고를 했다. 이름도 보육원이 지어줬다.

김 대표는 2004년 2월 고교 졸업 직후 홀로서기할 때까지 보육원에서 생활했다. 보육원은 갈 곳 없는 그를 거둬, 보살피고 키워준 고마운 곳인 동시에 '지옥'이기도 했다. 보육원을 생각하면 항상 배고프고 맞았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밥 한 그릇 더 먹고 싶어 식판을 가져가면 파리채로 맞았다. 여름 내내 반찬으로 나온 오이냉국에는 파리가 둥둥 떠다녔다. 간식으로 나온 찐 옥수수에는 애벌레도 많았다. 중고생 형들과 한 방에서 지내면서 형들한테 시도 때도 없이 맞고, 심부름하기 바빴다. 그 장면을 본 보육교사도 형들에게 '적당히 하라'며 눈감아 줬다.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북파공작원을 소재로 다룬 영화 실미도를 보고 우리는 '저 정도면 천국'이라고 했어요. 그때는 배고파서 먹었던 옥수수 감자는 지금 입에 대지도 않죠. 동년배보다 한국전쟁 전후로 극심한 가난을 경험한 60, 70대 어른들과 오히려 대화가 잘 통해요."

지옥 같은 보육원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오죽하면 갈 곳 없는 아이들이 그랬을까? 그러나 곧 보육원 아이들로 구성된 '수색대'가 꾸려진다. 뛰쳐나간 친구는 수색대 또는 경찰에 붙잡혀 왔다. 그럴 때면 으레 보육원의 개선과 변화를 기대했다. 도망간 친구가 '지옥 같은 일이 벌어진다'며 일상을 경찰에 얘기하니까. 그럴 때마다 경찰은 아이를 인계하며 보육원에 "관리 잘 하시라"고 주의만 주고 떠났다.

"그 시절 국가의 지원도 부족하고, 형편도 여의치 않으니까 그랬겠지만, 잘못된 걸 알면서도 묵인하고 그냥 넘어가는 보육원 선생님과 경찰의 모습을 보고 어른을 절대 믿지 않게 됐어요."

학교 선생님에게 상담 신청이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떠들면 자신이 본보기로 가장 먼저 맞으며 차별을 당해 역시 믿지 못했고, 도움을 요청할 '머리'도 없었다고 했다. 학교에서건 보육원에서건 공부를 하려 해도 절대 할 수 없는 환경에 노출된 결과다.

김 대표는 "(학교에서) 지능지수(IQ)검사를 했더니 80 이하인 '경계성지적장애(지능평가상 IQ 70~85)'였다"며 "그림이 있는 만화책을 읽어도 이해가 안 돼 첫 장을 넘기지 못할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경계성지능장애는 지적장애(IQ 70 이하) 수준은 아니지만 지적능력이 평균보다 낮다는 걸 뜻한다. 그는 "지금 보육원도 우리 때처럼 열악하지는 않지만, 제가 만난 많은 보호아동과 자립준비청년들은 지적 능력이 일반학생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며 "그래서 평범한 부모 밑에서 보고 자랄 수 있도록 가정위탁(양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포의 시간 '보호종료', 두려움·경계심이 인생 뒤바꿔

김성민(오른쪽 다섯 번째) 브라더스키퍼 대표와 직원들. 브라더스키퍼 제공

김성민(오른쪽 다섯 번째) 브라더스키퍼 대표와 직원들. 브라더스키퍼 제공

만 18세에 고교를 졸업하면 '시설 보호'가 끝나 보육원을 나가야 했다. 압박감은 상당했다. 고3이 되면서 대학 입시에 매진해야 할 때 그는 하루하루 다가오는 그날이 두려워졌다. "어떤 선배는 교도소에 들어갔대", "어떤 형은 경찰서에 잡혀갔대", "또 어떤 누나는 성매매하고 있대" 등으로 먼저 퇴소한 선배들의 소식을 보육원에서 들어온 터라 공포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서운 공포영화를 1년 내내 혼자 보는 느낌이었어요. 형 누나들이 겪은 상황을 내가 직면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공포심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리고 1년 뒤에는 내가 그 공포영화 안으로 들어가야 하잖아요. 스트레스가 심해 병원에 갔더니 요양 가야 되는 상황이라고 할 정도였죠."

2004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니까 보육원은 "일주일 안에 퇴소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쫓기듯이 나왔다. 수중에는 옷 몇 벌 등을 넣은 짐가방과 먼저 퇴소한 보육원 선배가 "차비로 쓰라"며 보내준 5만 원이 전부. 그 돈으로 무작정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강변역 동서울터미널에 왔다. 그저 "일자리가 있겠지"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오산이었다. 기약 없는 노숙이 시작됐다. 화장실에서 씻고, 사람들이 버린 옷을 주워 갈아입었다. 계단에서, 화장실에서, 공원에서 잠을 청했다.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을 주워 먹었다. 상가나 사무실에서 배달시켜 먹고 남아 내놓은 양호한 음식은 '특식'이었다.

다만 절대로 행인에게 구걸하지 않았다. 심지어 경찰서나 동사무소에 도움을 청할 생각도 못했다. 그런 경험도 없거니와 어른을 신뢰하지 못해서였다. "실제로 '돈 벌게 해줄 테니 따라오라', '재워줄 테니 같이 가자' 같은 어둠의 손길도 있었죠. 형들이 사기 사건이나 범죄에 휘말렸다는 얘기가 그때 번뜩 떠오르면서 '이렇게 사기에 휘말리는구나'라고 깨닫고 차단했죠. 너무 무섭고 두려워 '차라리 굶어 죽고 말지'라는 생각이 더 컸어요."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자리가 필요했던 그는 형들이 '식당에서 일한다'고 했던 걸 떠올렸다. 개업을 앞둔 한식당에 취업해 숙식을 해결했다. 성실히 일하며 돈도 모았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된 뒤 '나처럼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을 돕자'는 생각이 들어 비정부기구(NGO)에서 7년간 근무했다. 가끔씩 외롭고 홀로서기가 힘들 때는 종교생활로 심신을 위로했다. 26세에 뒤늦게 대학에도 진학해 사회복지와 신학을 함께 배우는 '사회복지선교학'을 전공했다. 주중에는 학업에 전념하고, 주말에 전국 200여 개 보육원을 다니며 자립을 앞둔 청소년을 후원하고, 이들에게 일자리를 연결해주는 일을 보람 있게 했다.

극도의 불신과 경계심이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을 바꾼 셈이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자칫 낭떠러지로 떨어진 여느 선배들과는 다행히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일자리보다는 상처 치유가 먼저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가 올해 1월 14일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당시 김부겸 국무총리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고 있다. 브라더스키퍼 제공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가 올해 1월 14일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당시 김부겸 국무총리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고 있다. 브라더스키퍼 제공

'자립의 핵심은 일자리'라는 신념으로 불철주야 뛴 그의 노력은 자립준비청년 100여 명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성과로 이어졌지만, 아쉽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후원받을 때는 문제없던 아이들이 후원이 중단되는 순간 성매매나 사기사건에 휘말리고 범죄자가 되는 걸 보며 후원으로는 자립이 어려운 현실을 절감했다. 일자리를 연결해줘도 보통 1, 2주 만에 나오거나 길어 봤자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사회에서 혼자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할 때 조언을 구하고,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멘토 또는 부모님 역할을 할 '사회적 가족제도'가 그래서 필요하다. 현재는 이런 제도가 없어, 브라더스키퍼가 자존감 회복 교육, 진로교육, 자기 표현, 경제교육, 주거교육, 법률교육(임대차계약·근로계약 등) 등 여러 가지 자립교육 사업도 펼치고 있다.

또 고용 기업과 아이들 얘기를 들어봤더니 또 다른 문제점이 파악됐다. "직장에서 선배나 동료가 잘 챙겨주면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 불쌍한가'라고 넘겨짚고, 일하다 실수해서 혼나면 그럴 수도 있는데 '보육원 출신이라서 막 대하나'라고 생각한다는 공통점이 나왔어요. 피해의식이나 자격지심이 큰 겁니다. 버려진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사회에 나와 벌어진 일입니다. 보통 부모에게 사랑받고 용서받고 인정받으며 성장하는 것처럼, 정서적 안정과 지지가 필요했죠."

그는 "경제적 지원과 일자리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상처 회복이 중요하다"며 "아이들이 사랑을 담아 식물을 키우면서 아픔을 치유하고 정서를 회복하는 프로그램을 수년간 진행하다 브라더스키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소수의 교사가 수십 명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보육할 때는 사실상 방치할 수밖에 없어 절대 아이들의 심리까지 살필 수 없다"며 "전국 보육시설을 실태조사해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추석 소망 "가정 꾸려도, 어른 돼도 부모님은 필요"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가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이전 명절 모임에서 자립준비청년들과 전을 부치고 있다. 브라더스키퍼 제공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가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이전 명절 모임에서 자립준비청년들과 전을 부치고 있다. 브라더스키퍼 제공

김 대표의 물심양면 지원 덕에 직원으로 채용한 자립준비청년들도 성공적으로 자립했다. 자립준비청년인 직원 8명 중 5명이 회사에 다니면서 결혼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진 직원들에게도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드디어 생긴 것이다. 그 역시 일찌감치 대학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해 가정이 있다. 자립준비청년들의 '진정한 자립'에 기여하며 성공사례를 제시한 그는 올해 1월 국민추천을 통해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그래도 명절이 다가올 때면 심경이 복잡하다. 여전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많은 자립준비청년들이 생각나서다. 이들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올해는 추석연휴 기간(9~11일) 자립준비청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가장 외로워지는 매년 설날·추석 명절 때마다 가족이 없는 직원들, 주변의 자립준비청년들과 명절을 함께 보내왔어요. 최근 2년 동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 확산으로 명절에 모일 수 없어서, 대신 음식을 보내줬죠. 올해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돼서 그런지 명절 몇 달 전부터 모임하는지 물어보는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사전에 참여 신청을 받았는데 몇 시간 만에 정원(1일 20명, 총 60명)이 다 찼지 뭐예요. 그만큼 외롭고 가족이 그리웠나봐요."

가정을 꾸린 김 대표 역시 여전히 부모님을 찾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어버이날 부모님께 감사편지 쓰는 시간에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 부모님. 중학생 때 자신의 이름 생일 주민번호가 부모님이 만들어 준 게 아닌 것을 알게 돼 '언젠간 만날 수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마저 사라지게 한 그 부모님 말이다.

지난해 5월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며 "저를 찾아주세요"라고 공개편지를 쓰기도 했다.

"서른일곱 살이 돼도, 가정을 꾸려도, 부모님은 여전히 보고 싶어요. 명절 모임 때 더욱 보고 싶죠. 어른에게도 누구나 부모라는 존재가 필요하잖아요." 그의 추석 소망이다.

박민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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