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여행)에 집착했던 페렉으로의 여행

입력
2022.08.31 21:00
25면

조르주 페렉·자크 루보 지음, '겨울 여행/어제 여행'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15일 광복절, 경북 영천 금호읍을 시작으로 엄청난 문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문건들은 1800년대의 무명작가로만 알려진 김호영씨의 습작들인데요. 지금까지는 그의 작품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가가 불에 타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원본을 찾기도 쉽지 않지만 당시, 김호영 작가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거의 없어서이기도 했습니다.

김호영 작가는 경북 경주시 천북면 출생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왜 그의 작품들이 영천 근방에서 발견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은둔적 성향으로 보았을 때 홀로 여행을 다녔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합니다. 금호읍의 문건들 이외에 거리가 좀 떨어진 주왕산 근처에서도 비슷한 문건이 발견된 것이 그 방증입니다.

한편 이번에 영천 등지에서 발견된 문건들로 인해서 대한민국 문학사가 발칵 뒤집힐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건들에는 김호영 작가와 그의 글쓰기 스승으로 보이는 한 교수가 주고받은 자필 편지, 당시 김호영 작가가 써서 교수에게 보냈던 작품들 여러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이 작품들 중 시와 소설 장르로 보이는 여러 글이 현재 가공할 인기를 누리는 김영하 작가, 이병률 시인, 김훈 작가 등의 작품과 상당 부분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고(故) 박완서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편지와 작품들의 상태를 보았을 때 지금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의 출생보다 이른 시기에 쓰였다는 것이 예상되어 문학계에 엄청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김호영 작가의 생가가 완전 소실되었고 그의 실제 출생일이나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교수의 실제 존재 여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이 글이 정말 1800년대에 쓰인 글인지 증명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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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하며 이 기사를 읽은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사실 나는 조르주 페렉의 '겨울 여행/어제 여행'을 읽으며 겪었던 심리적 카오스를 함께 겪을 수 있어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좋은 건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이기에. 지금쯤 아시겠지만 당연히 위의 글은 '겨울 여행/어제 여행'을 읽고 난 뒤 작성한 가상의 기사이다.

조르주 페렉은 프랑스 문단에 한 획을 그은 작가다. 그는 평범한 글보다는 수학, 과학을 접목한 글과 예측 불가능한 숨바꼭질 스타일의 글을 즐기던 사람이다. 당시 정체기를 겪고 있던 프랑스 문단에 레몽 크노 등과 함께 '울리포(OuLiPo, 잠재 문학 작업실)'의 멤버로 활약하며 문학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현재 울리포의 회장인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2020년 공쿠르상 수상 작품)가 국내 출간되어 인기를 끌면서 울리포에 대한 관심도 조금은 더 생긴 것 같다.

'겨울 여행/어제 여행'에서 조르주 페렉이 쓴 글은 '겨울 여행' 부분인데 위의 가상 기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유명 시인들인 로트레아몽, 말라르메, 랭보, 베를렌 등의 시구를 모아놓은 책을 우연히 발견하는데 문제는 이 책의 출간 연도가 1864년이었다는 거다. 이 책을 쓴 무명 시인인 위고 베르니에는 어떻게 미래에 유명해질 글을 모아서 책을 썼을까? 아니면 19세기 후반 유명 시인들이 위고 베르니에라는 무명작가의 글을 알게 모르게 베꼈던 것일까? 주인공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한편 '어제 여행'은 조르주 페렉의 절친한 친구이자 울리포의 멤버였던 시인 자크 루보가 조르주 페렉 사후(死後)에 '겨울 여행'에 이어 쓴 소설이다. 여기서는 더 흥미진진하게도 앞서 등장한 위고 베르니에의 시집보다 더 앞서 쓴 '위고 베르니에의 시들'이 등장한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 출간이 무산된 작품으로 인해 보들레르는 이 시들을 통째로 가져다 쓴 표절자로 의심받게 된다.

이 소설들은 '표절'과 '오마주'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생각하게 하고 최근 더욱 불거지는 '창작이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를 되묻고 있다. 더불어 이 소설이 픽션인지 실제인지, 읽을수록 혼란에 빠져들게 하는 페렉과 그의 절친 루보의 능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페렉이 이야기한 "글쓰기란 이미 쓰인 모든 작품에 대한 독서에서 출발한다"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소설들이다. 이들은 제목마저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프랑스 원 제목인 Voyage d’hiver(겨울 여행)에서 v를 빼면 Voyage d’hier(어제 여행)가 되는데 평생 v에 집착했던 페렉에게 바치는 자크 루보의 선물인 것 같다.

페렉이 왜 평생 v에 집착했는지 이야기하려면 지면이 모자라니 일단 '겨울 여행/어제 여행'부터 읽어보도록 하자.

아직 독립 못 한 책방

  • 박훌륭 대표

아직 독립 못 한 책방은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작은 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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