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미 독립기념일… 29년 만에 통과된 총기규제법도 소용없었다

입력
2022.07.05 20:00
시카고 교외서 축하 퍼레이드 도중 총기난사 발생
연방 총기법 발효 9일 만… 바이든 "폭력에 맞설 것"
총기사건 최다치 근접… 공격용 총기 금지 여론 격화

4일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 도시 하이랜드파크에서 경찰이 현장 주변을 수색하고 있다. 시카고=AP 뉴시스

미국 최대 국경일인 독립기념일이 피로 물들었다. 일리노이주(州) 시카고 교외에서 축하 퍼레이드 행렬을 겨냥한 무차별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6명이 숨지고 40명 가까이 다쳤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새로운 ‘총기규제 강화 법안’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일어난 참극에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공격용 총기 퇴출을 비롯해 더욱 엄격한 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다시 들끓고 있다.

축제의 날을 비극으로 만든 총성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AP통신 등에 따르면, 이번 총기난사 사건은 시카고 북쪽 교외 도시 하이랜드파크에서 4일(현지시간) 오전 10시 독립기념일 퍼레이드가 시작된 지 10여 분쯤 후 발생했다.

흥겨운 음악 소리를 뚫고 인근 건물 옥상에서 갑작스럽게 연달아 총성이 울렸다. 관람객들은 불꽃놀이용 화약 폭발음으로 착각했으나, 이내 사람들이 하나둘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축제 현장은 아비규환으로 돌변했고, 주민들은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대피했다.

당시 식료품점에서 근무하고 있던 한 목격자는 “총성이 30발 정도 들렸고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고 NYT에 말했다. 퍼레이드를 관람하던 지역 주민 알렉산더 산도바는 “총격범이 총격을 멈추고 탄창을 재장전하는 틈에 주변 건물 앞 쓰레기통에 아들을 숨겼다”고 말했다. 핏자국이 흥건한 거리에는 의자, 유모차, 음료수 컵 등이 나뒹굴었고, 범행이 벌어진 옥상에선 공격용 소총이 발견됐다.

하이랜드파크 경찰은 최소 6명이 사망하고 총상을 입은 36명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고 밝혔다. 부상자 중에는 어린이도 4, 5명 포함됐다. 중상자가 적지 않아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토퍼 코벨리 레이크카운티 중범죄 태스크포스 대변인은 “용의자가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며 주민들에게 집에 머물라고 당부했다. 하이랜드파크는 물론 데어필드와 노스브룩, 애번스턴 등 인근 지역들도 독립기념일 행사를 전격 취소했다.

4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 도시 하이랜드파크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퍼레이드 현장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한 혐의로 체포된 22세 백인 남성 로버트 크리모 3세. 크리모 SNS 영상 캡처

사건 발생 9시간 만에 붙잡힌 용의자는 22세 백인 남성 로버트 크리모 3세로, 2019년 하이랜드파크 시장에 출마했던 지역 유지의 아들로 확인됐다. 용의자는 2020년부터 래퍼로 활동해 왔는데, 2021년 발매한 앨범에는 총기난사를 암시하는 노래 가사가 수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범행 동기는 파악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 성명을 내고 “독립기념일에 미국 사회는 또다시 총기폭력에 충격을 받았다”며 “총기폭력 확산과 맞서 싸우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J.B.프리츠커 일리노이 주지사도 “독립은 일 년에 한 번 기념하는데 대형 총기 사건은 일주일마다 치르는 전통이 돼 버렸다”며 “이 ‘전염병’을 끝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허술한 총기규제, 비극 키웠다

불과 9일 전인 지난달 25일 연방정부 차원에서 29년 만에 새로운 총기규제 법안이 발효됐지만, 총기난사 사건을 막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8~21세 총기 구매 시 범죄기록 조사 △위험 인물의 총기를 압류할 수 있는 ‘레드 플래그 법’을 채택하는 주에 장려금 지급 등 최소한의 규제만 담긴 탓에 이번 사건처럼 22세 이상 성인이나 기존 총기 소지자는 법망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공격용 총기 및 대용량 탄창 금지, 모든 총기 거래자에 대한 신원조사 의무화 등 민주당과 총기규제 옹호단체들이 주장해 온 핵심 조항은 공화당 반대로 모두 빠졌다.

4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 도시 하이랜드파크에서 독립기념일 기념 퍼레이드 행렬을 겨냥한 무차별 총격 사건이 벌어진 후 한 여성이 참혹한 현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시카고=AP 연합뉴스

총기규제 옹호단체 ‘총기로부터 안전한 마을’에 따르면 일리노이주는 주법으로 총기 구매자 신원 조회, 레드 플래그 조항, 안전 보관 요건 등을 규정하고 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6번째로 총기법이 엄격하고 총기 소유 비율은 9번째로 낮다. 그럼에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총기규제가 느슨한 인디애나주, 미주리주 등 이웃 지역에서 불법 총기가 흘러들기 때문이다. 연방법 없이 주법으로만 총기난사를 막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 5월 어린이 19명, 교사 2명이 숨진 텍사스주 유밸디 초등학교 총기 참사와 10명이 숨진 뉴욕주 버펄로 슈퍼마켓 총기 참사로 인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하이랜드파크 사건이 벌어질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는 “전국에 충격을 안긴 이번 사건으로 더 엄격한 총기규제법을 요구하는 여론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비영리 연구단체 총기폭력아카이브(GVA) 집계 결과, 올해 6개월간 미국에서 사상자가 4명 이상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은 무려 309건에 이른다. 역대 최다(총 692건)였던 지난해 상반기 327건에 육박한다. 20명 이상 희생된 대량 살상 사건도 15건이나 됐다. 현재까지 총기 관련 사망자는 1만72명으로, 이러한 추세라면 올 연말까지 지난해 최다 기록인 2만944명에 근접할 가능성이 크다고 GVA는 전망했다.

김표향 기자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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