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가 만든 여행자의 방… 숲속 그늘에 차린 다방

입력
2022.07.05 17:00
순창 금산여관과 놀게다방

홍성순(왼쪽부터) 금산여관 사장, 박시도 놀게다방 주인장, 채병용 모멘트립 카페 사장이 금산여관 마루에서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순창공영버스터미널에서 약 400m 거리, 낮은 주택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골목에 조금은 특별한 여행자의 집(게스트하우스), 금산여관이 있다. ‘여관’이라는 상호 때문에 하룻밤 대충 눈 붙이고 가는 장소로 생각하면 오해다. 실상은 며칠씩 묵어가는 손님이 수두룩한 순창의 명소다.

금산여관은 1938년에 지은 오래된 건물이다. 33년간 여관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고 12년째 폐가로 방치되다 2014년 옛 이름 그대로 다시 태어났다. 대문에 걸린 옛날 간판에는 4자리 전화번호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주인장 홍성순씨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다.

금산여관 대문에 걸린 오래된 간판. '금'과 '산' 자 사이에 희미하게 옛날 전화번호가 남아 있다.


금산여관 주방. 투숙객이 간편하게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금산여관에 딸린 카페 '모멘트립'. 현재 순창 출신의 채병용씨가 운영하고 있다.


금산여관에 딸린 카페 '모멘트립' 내부.


그 자신 수십 개 나라를 돌아다닌 여행자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게스트하우스의 허술한 점이 눈에 들어왔고, 혼자 여행하는 여성도 불편하거나 위험하지 않은 숙소를 직접 해보자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유명 백화점의 잘나가던 스포츠 의류 매장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장소를 물색했다.

도시도 아니고 산골도 아닌 지역, 터미널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 그러면서도 차량 소음이 없는 곳, 한옥이면서도 방마다 화장실을 갖춘 집, 여행자와 주인이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구조, 뜬금없이 여행하는 사람도 스스럼없이 들어갈 수 있는 집. 이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집이 딱 금산여관이었다.

“막상 현장을 보니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엄두가 나질 않는 거예요. 포기하려 했는데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이 나서 결국 계약하고 말았죠.” 그는 이 집에 스토리를 입히고 싶었다. 그래서 공사도 지역 업체에 맡겼고, 소품도 대부분 순창에서 구입했다. 집 안팎의 장식물도 자신이 해외여행 중 구입했거나 손님들이 기증한 물품이다.

금산여관의 진짜 스토리는 건물이 아니라 여행자와 함께 써 가는 프로그램에 있다. 1년에 서너 차례 부정기적으로 여는 ‘구들장쑈’가 대표적이다. 소규모로 모여 오순도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종의 강연회, 연주회, 북콘서트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사진작가 신미식, 화가 김물길, 개그우먼 정선희가 ‘구들장쑈’를 거쳐갔다. 홍 대표는 유명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했다. 매년 7월 26일에는 금산여관 생일잔치가 열린다. 춤추고 놀고 먹고 이야기하고, 한 지붕 아래서 잠자는 것에 초점을 맞춰 진행된다. 자칭 ‘마이너리티(비주류)의 문화 아지트’인 셈이다.

금산여관 마당 한가운데에 개가죽나무가 솟아 있다. 한옥 처마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2018년 금산여관 마당에서 진행된 '구들장쑈'. ⓒ홍성순 대표 페이스북


금산여관의 작은 갤러리. 홍성순 대표가 여행하면서 구입한 물품이나 투숙객의 기증품을 전시하고 있다.


에어컨도 없이 삼복더위를 견뎌야 하는 집이지만 단골 손님이 꾸준히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급스럽고 예쁜 숙소는 수도 없이 많잖아요. 우리나라에 이런 숙소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요? 왠지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꼭 그런 숙소가 있을 것 같은, 그래서 일부러 찾아가는 여행자의 집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금산여관의 행사는 홍 대표의 SNS 계정을 통해 공지한다.

금산여관 손님들은 틀에 짜인 여행에 얽매이지 않는 편이다. 강천산이나 용궐산 등 근처 관광지를 다녀오기도 하지만, 느지막이 일어나 마을을 어슬렁거리거나 여관에 딸린 카페 ‘모멘트립’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런 ‘자유로운 영혼들’에게 홍 대표가 추천하는 곳이 딱 한군데 있다. 바로 적성면 산골짜기 강경마을의 ‘놀게다방’이다. 근사한 숲속 카페를 상상한다면 여행 목록에서 제외하는 게 낫다. 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2.5㎞ 울창한 숲길을 통과해야 나오는 ‘놀게다방’에는 건물이 없다. 나무그늘에서 차 한잔 마시며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놓거나 ‘차 정원’을 산책하는 게 방문객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기대를 품고 왔다가 모기 때문에 짜증을 내는 이도 더러 있다고 한다.

순창 적성면 숲속의 놀게다방. 자칭 '차 요정' 박시도 대표의 일터이자 쉼터다.


놀게다방은 번듯한 건물 없이 숲속 그늘에 차린 다방이다. 바로 옆의 '차 정원'과 '차숲'을 산책할 수 있다.


차 정원에서 우려내는 놀게다방의 차. 놀게다방은 차 한잔 마시며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들어주는 곳이다.

“덴마크는 휘게, 스웨덴은 피카, 코리아는 놀게.” 자칭 '차 요정' 박시도 대표는 바쁜 일상 속의 쉼표 같은 곳이라는 의미로 자신의 일터를 놀게다방으로 명명했다. 차 정원은 나무가 듬성듬성 섞인 거친 차밭인데, 사실 이것도 많이 다듬은 것이다. 실제 그의 차밭은 나무와 함께 자라는 진짜 야생의 ‘차숲’이다.

박 대표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다 때로는 멈추는 곳”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놀게다방은 실제 다방이 아니어서 온라인 지도에도 없다. 금산여관을 통하면 가는 길을 알 수 있다.

순창=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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