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금감원장의 '금리 인하' 요구... 시작은 '박정희'였다

입력
2022.06.25 12: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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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결정권은 국가에서 은행으로 이동
관치금융 장기화로 금융산업 발전 더뎌
"은행의 공적 기능 역시 무시할 수 없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은행 대출금리에 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섰습니다. 은행을 감독하는 금융감독원은 물론, 심지어 대통령과 여당까지 가세해 은행권을 압박하는 모양새네요. 반면 은행권은 “관치금융이 부활했다”며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해야 할 금리를 왜 정부가 간섭하냐는 불만이죠.

사실 금리를 둘러싼 정부와 은행의 갈등은 아주 오래됐어요. 짧게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고요, 길게는 1960년대까지 간답니다. 그야말로 ‘금리 전쟁사’라고 할 수 있어요. 최근 촉발된 갈등은 '금리 전쟁사'의 한참 뒤 페이지인 셈이죠. 모든 이야기는 역사적 맥락을 이해했을 때 그 의미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자, 그럼 첫 페이지로 이동해 볼까요.

대출 금리를 국가가 정해줬다고?


박정희 정권이 1962년 6월 16일 긴급금융조치법을 공포한 내용이 다음날 한국일보 1면에 실렸다. 화폐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꾼 긴급금융조치법은 2005년 폐지됐다.

박정희 정권이 1962년 6월 16일 긴급금융조치법을 공포한 내용이 다음날 한국일보 1면에 실렸다. 화폐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꾼 긴급금융조치법은 2005년 폐지됐다.

지금처럼 대출금리를 은행이 정해주기 이전엔 국가가 결정했어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그해 시중은행들을 모조리 국유화했습니다. 대출금리 결정권이 국가로 넘어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죠. 당시엔 모든 것이 부족했던 상황이기에, 국가 발전을 위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수출대기업들에겐 예금금리보다 낮은 대출금리를 제공해줬어요.

‘한강의 기적’은 이뤄냈지만, 관치금융의 그림자 역시 길게 드리워졌어요. 약 20년간의 독재로 돈을 빌리기 힘든 서민과 중소기업은 사채시장과 2금융권을 전전해야 했어요. 선택받은 소수와 수출대기업만이 1금융권 대출을 저금리에 이용할 수 있었죠. 은행은 나라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되니, 금융산업도 후퇴했지요.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답니다.

드디어, 은행이 금리를 결정하다

노태우 정부가 1988월 12월 1일 발표한 금리자유화 조치가 다음날 한국일보 1면에 실렸다. 해당 조치는 시중 금리 인상 등 부작용으로 철회됐다.

노태우 정부가 1988월 12월 1일 발표한 금리자유화 조치가 다음날 한국일보 1면에 실렸다. 해당 조치는 시중 금리 인상 등 부작용으로 철회됐다.

전두환 신군부는 적어도 일부 금융정책에 있어선 박정희 정부와 달랐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이 없었던 만큼,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선 박정희 정부와 차별화한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었다네요. 어쨌든 ‘금융 자유화’를 표방한 신군부는 1981년 시중은행들을 민영화했고, 수출대기업에 제공한 금리 혜택도 상당폭 축소했어요. 은행 통제 조직들을 없애면서 금융산업도 발전하기 시작했죠.

‘금융 자유화’의 핵심 사항인 ‘금리 자유화’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본격적으로 추진됐어요. 1987년 민주 항쟁 이후 정치 민주화뿐만 아니라 경제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높아진 영향을 받았죠. 한국은행·경실련 등도 '금리 결정은 정부의 일방적 결정이 아닌, 은행의 독자적 수익성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물론 재벌들은 대출금리가 올라갈 것이라며 반발했답니다.

금리자유화가 도입됐지만, 한국은 1997년 IMF 외환위기에 직면했어요. 외환위기의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관치금융도 주요한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어요. 관치에 길들여진 은행들의 대출 심사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죠. 외환위기로 10곳이 넘는 시중은행이 퇴출됐고, 무려 86조9,000억 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어요.

다시 시작된 관치금융? "공적 역할 잊지 말아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23일 서울 중구 조선호텔에서 열린 금감원장-연구기관장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23일 서울 중구 조선호텔에서 열린 금감원장-연구기관장 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이제 '금리 전쟁사’ 최근 페이지를 읽어 볼게요. 우선, 앞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시중은행 금리 결정권은 국가에서 은행으로 넘어왔다.” ②"관치금융이 장기화하면서 한국 금융산업의 발전이 지체됐다.”

최근 대통령·여당 등의 얘기를 요약하면 “예대금리차(예금과 대출의 차이)가 확대되면서 은행의 지나친 이익 추구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더 압축하면 “대출금리 내려라”입니다. 국가가 은행 금리 결정에 개입했다는 점에서 ①에 어긋나고, 동시에 자칫 ②에 대한 역사적 몰이해가 의심되는 발언이죠. 해당 발언에 은행들이 화들짝 놀란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금융당국의 해명도 들어보겠습니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관치금융 부활에 대한 은행들의 우려를 충분히 알고 있다”면서도 “은행업이 인가제로 운영되는 특성상 은행들도 그들의 공적 역할에 충실할 필요성이 있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했어요. 아울러 은행이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영향력을 고려해 공적자금 지원을 받는다는 점도 은행의 공적 역할을 강조하는 근거로 거론했습니다.


편집자주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들
-한국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기원(2021년, 박찬종 광운대 인제니움학부 교수)
-한국 발전국가의 관치금융과 금융산업의 저발전(2015년,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한국의 금융자유화와 금융위기(1999년, 조윤제 한은 금통위원)
-金利의 市場調整機能에 관한 實證分析 -금리자유화 정책에 대한 평가와 시사점(1997년, 이동헌 아주대 석좌교수)
-금융산업개편과 금리자유화 과제(1993년, 하성근 전 한은 금통위원)
-금리자유화조치와 통화정책(1994년, 백용호 전 국세청장·전 공정거래위원장)


김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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