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불평등한 인플레이션

입력
2022.06.16 04:30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최근 서울 중구 세븐일레븐 소공점에서 직원이 컵라면을 진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매일 책상머리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꼬박 정해진 월급을 받으며 산다. 스트레스 해소를 명분 삼아 서너 달에 한 번쯤은 백화점 화장품 코너를 기웃대고, 그런 날은 그 백화점 지하에서 장도 본다. 지난 주말 호텔 결혼식 참석 뒤엔 1층 로비 카페에서 동창들과 한 잔에 1만8,000원짜리 밀크티도 마셨다. 대단한 재산도 없지만 당장 막지 않으면 안 되는 빚도 없음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그런 삶이다.

물가가 그야말로 폭주한다는 요즘, 나의 소비를 돌아본다. 내 지갑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두통을 핑계로 매일 5,000원이 넘는 커피 한잔을 사 마시고, 주말엔 주말이라고 2만 원 넘는 파스타도 사 먹는다. 정작 애는 사 달란 말도 안 했는데 '우리 애가 입고 신으면 얼마나 귀여울까' 혼자 생각하며 주저 없이 카드를 긁기도 한다. 평소 씀씀이가 헤프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사치라면 사치고 아끼려면 아낄 수 있는 돈이다.

물가는 불공평하다. 물가가 오른다고 누구나 똑같은 크기로 힘들고 팍팍해지는 건 아닌 거다. 한 봉지에 3,000원짜리 고급 라면 가격이 4,000원으로 30%가량 올랐다고 치자. 이 고급 라면만 즐겨 사 먹던 여유로운 자 A씨, 그에게도 4,000원짜리 라면은 부담일 수 있다. 그때 그는 '라면이 거기서 거기지'라며 1,000원짜리 라면으로 갈아타면 그만이다.

하지만 빠듯한 살림살이에 원래부터 800원짜리 라면만 먹던 B씨는 다르다. 1,000원대로 뛴 라면을 장바구니에 넣을 때마다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B씨는 '라면마저 비싸면 어떡하냐'며 꼼짝없이 가격 인상분을 부담해야 하고, 안 되면 라면조차 장바구니에서 빼야 한다. 물가가 무서운 이유다.

실제로 한국경제연구원이 2020~2021년(2018~2019년 대비) 소득 수준별 체감물가를 분석해 봤더니, 소득 하위 20%인 1분위의 체감 물가 상승률이 소득 상위 20%인 5분위보다 1.4배 높았다. 소득이 낮을수록 식료품이나 주거, 수도비 등 일상생활을 하는 데 도저히 안 쓸 수 없는 소비 비중이 높다. 물가 상승은 곧 생존의 문제가 된다. '살인 물가'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고, 이번 정부를 포함해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생활 물가를 안정시키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오른팔로 알려진 찰리 멍거 부회장이 올 초 이런 말을 했다. "인플레이션은 핵 전쟁을 제외하고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기적 위협이다." 물가 상승에 핵 전쟁을 갖다 붙이다니. 지나친 비유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발언이다. 물가가 그야말로 폭주하는 시대, 누군가는 사치를 줄이면 그만이지만, 누군가는 생계를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삼겹 대신 냉삼겹이 밥상에 오르고, 월 50만 원 넣던 적금을 30만 원으로 줄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몇 만 원은 우습게 나갈 수밖에 없는 탓에 소개팅을 포기하고 동창회에도 등을 돌린다. 편의점 도시락을 찾는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커피플레이션, 런치(점심)플레이션, 누들(면)플레이션, 밀크(우유)플레이션... 동시다발적으로 지구를 덮친 물가 공격에 지구인들이 휘청이고 있는 요즘, 인플레이션의 가혹한 불평등이 주는 고통은 이렇게 크다.


조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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