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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청과물 경매시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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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넘어 찾아간 청과물 도매시장은 전국 각지에서 집결한 갖가지 채소들이 수십 개의 네모 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이, 감자, 고구마, 대파, 호박, 양파처럼 익숙한 농산물이 가게 입구마다 빼곡하게 진을 치고 쑥, 두릅 순, 엄나무 순 같은 봄나물들 역시 적잖은 지분을 차지했다. 그 사이로 새송이버섯, 명이나물, 깨 순, 취나물, 표고, 꽈리고추 등 족히 백 종은 될 듯한 농산물이 수줍게 제 개성을 드러낸 모습이 흡사 부끄럼쟁이 아이처럼 사랑스러웠다.
4년 전 고향에 있는 내 소유 작은 땅을 일구어 소꿉놀이처럼 시작한 농사일이 더는 놀이가 아니게 된 건 작년 말부터다. 늦가을에 탈탈 털어 수확한 들깨를 고향 집 창고에 챙이고, 하필 내 앞에서 들기름의 효능을 늘어놓는 몇몇 친구에게 방앗간에서 막 짜낸 들기름까지 선물한 뒤 올해 농사는 개운하게 갈무리했다며 뿌듯해하던 바로 그 무렵이다. 이제 석 달간 서울 시민답게 고궁 산책하고 미술관 들락거리는 주말을 보내자며 희희낙락하는 나에게 ‘농지 불법 임대’가 의심된다는 경고장이 날아든 것이다. ‘에라, 이 사람들아. 봄부터 가을까지 주말마다 꼬박꼬박 밭으로 달려가 땡볕에서 호미질한 게 벌써 몇 년째다. 그 밭에서 심고 거둬 지인들한테 선물한 감자며 미나리만 수백 박스인데, 뭐라? 불법 임대라고라?’ 울컥 욕부터 나왔다.
모름지기 관공서에 항의할 때는 교양인의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물 한 컵을 마시며 화를 누그러뜨리고는 경고장을 발부한 면사무소 담당 부서에 전화했다. 정중하고 깐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0대 후반쯤으로 추정되는 남성이었다. 몇 년째 농사지어온 땅에 ‘불법 임대’라는 딱지를 붙인 근거가 대체 무엇인지 따져 물었다. 그는 나에게 경고장을 발송한 당사자가 자신이라고 굳이 밝혔다. 일 잘하는 공무원다운 스마트함으로 5분 가까이 그가 해명한 이야기의 요지는 간단했다. ‘농부들의 신성한 생계 터전인 농지를 이용해 불법과 사기가 판치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네가 가짜농부가 아니라고 주장하려거든 ‘자경(自耕)’을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나에게 보여다오.’
단 한 마디도 허투루 내뱉지 않는 그에게 토를 달지 못했다. 그 뜻을 존중하노라 고분고분 말하며 통화를 마쳤다. 다행히 그간 묘목과 농자재를 산 영수증이라든가 서울-오송을 오간 기차표, 고속도로 톨게이트 통행 영수증을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물적 증거는 차고 넘쳤다. 문제는 그 통화 이후로 심리적 발동이 너무 세게 걸렸다는 거다. 기왕 이렇게 된 일, 내 땅에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농지원부를 발부받고 농업경영체 등록을 마쳤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농업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진짜 농부의 외피를 입었다는 의미다. 땅을 계획적으로 나눠 미나리와 두릅, 감자, 고추, 들깨를 심었다. 쑥쑥 자라는 농산물을 한 달 전부터 청과물 도매상에 내다 팔았으나 주말에 장이 서지 않는 통에 직접 방문하지 못하는 게 영 아쉬웠다. 그러다 어린이날과 주말을 낀 오늘, 마침내 기회를 잡은 거다.
길게 이어진 청과물 도매상가를 사열하듯 세 바뀌나 돌고 나서 차 안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까무룩 잠에 빠진 사이 차 소리와 사람들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경매가 시작됐다. 새벽 3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수십 개의 원이 만들어졌다 허물어지기를 반복하고 차에 물건을 가득 채운 트럭들이 분주하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풍경이 흡사 꿈결 같았다. 딩동! 몇 시간 전 저기에 내려둔 내 농산물이 팔렸음을 알리는 문자였다.
잠을 못 잔 탓인지 아니면 새로 만난 풍경 때문인지, 천천히 그곳을 나오는데 심박동이 빨라졌다. 이 경험들이 나를 또 어디로 이끌까. 섣불리 예단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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