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노동 유연화'에 술렁… "지금도 꼼수 판치는데 야근공화국 될라"

입력
2022.03.20 16:30
8면

'주 52시간' 1년 단위 계산, 예외 업종 확대 등
규제 완화에 방점… 노동계 "탁상공론"

2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종로구 한국금융연수원 별관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2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종로구 한국금융연수원 별관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정보기술(IT) 기업에 근무 중인 20대 A씨는 퇴근 후엔 물론이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울리는 카톡 때문에 괴롭다. 대표와 이사가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는데 바로 읽지 않으면 "또 자냐" "카톡 안 읽냐"는 메시지가 날아든다. A씨는 "IT 회사라 갑작스런 장애와 기술 지원에 불려갈 때가 많지만 주말수당이나 대체휴무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B씨 업무는 계속 기계를 돌리는 일이라 점심도 30분 안에 먹어야 한다. 일주일에 몇 시간이나 일하나 계산해봤더니, 60시간이 넘었다. B씨는 "회사에서는 연말에 몰아서 쉬면 되니까 주 52시간제를 지키고 있는 거라고 했다"며 "이런 방식도 되는 거냐"고 답답해 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노동 정책 핵심은 '유연성 확대'다. 주 52시간제를 칼같이 지키기보다는 계산 기준을 1년까지 늘리겠다고 했다. 1년 근무시간을 다 더한 뒤 나눴을 때 주 평균 52시간만 넘기지 않으면 되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가 노동 공약 1호다. 연장근로시간 특례업종과 특별연장근로 대상을 늘리는 것도 공약에 들어가 있다. 공약집에는 없지만 윤 당선인이 꾸준히 최저임금 인상에 비판적 입장을 드러냈던 터라 최저임금도 업종, 규모별 차등 적용이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노동계에선 현행 주 52시간제 아래에서도 A, B씨가 겪은 일처럼 '꼼수'가 판을 치는 게 현실인데, 무턱대고 유연화 정책을 펴는 건 불에 기름 붓는 꼴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상태에서 규제만 덜컥 풀어버리면 제대로 수당을 받지 못하는 연장근무가 더 많아지면서 이른바 '야근공화국'이 될 거란 우려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에 모인 민주노총 조합원들. 이날 참가자들은 "윤석열 당선인은 최저임금 차등화와 노동시간 유연화가 결국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져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스1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에 모인 민주노총 조합원들. 이날 참가자들은 "윤석열 당선인은 최저임금 차등화와 노동시간 유연화가 결국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져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스1


"진짜 문제는 '포괄임금제'"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20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올 1, 2월 접수한 제보 중 임금과 노동시간 관련이 29.5%였다.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주 52시간을 넘기는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했다는 내용이다.

'공짜 노동'을 합리화하는 배경에는 '포괄임금제' 악용이 있다. 연장근로나 휴일근로에 동의하고, 추가근무 수당은 이미 임금에 포함돼 있다는 조항이 문제다. 개발자 C씨는 "새벽 2, 3시에도 대표가 보이스톡으로 잠을 깨워 일을 시켰다"며 "1년 넘게 이렇게 일했지만, 포괄임금제라 야근수당이나 주말특근수당 단 한 푼도 못 받았다"고 했다.

심지어는 연차수당까지 포괄임금에 넣고, 이의 제기를 못하도록 '부제소 특약 합의'에 서명하도록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협업이 잦아 현실적으로 연차를 쓰지 못한 D씨는 "연차도 수당에 들어가 있으니 쉬려면 월급에서 까야 한다고 했다"고 토로했다. E씨 역시 "월급 270만 원 받는데, 미사용 연차수당까지 다 포함된 금액"이라며 "부제소 특약 합의에도 서명하게 시켰다"고 밝혔다.

'노사합의' 전제로는 부족… "실태 조사부터"

노동계 반발에 윤 당선인은 사측이 마음대로 근로 시간을 늘리지 못하도록 '노사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입장이지만, 직장갑질119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조가 없는 직장인이 85.8%에 달한다. 회사와 합의할 근로자 대표를 뽑더라도 '직접 투표로 선출한다'와 같이 방식에 대한 법 규정은 없다. 회사 입맛에 맞는 사람이 근로자 대표가 되는 걸 막을 장치가 없다는 한계다.

노동시간 유연화에 앞서 포괄임금제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게 노동계 지적이다. 실태조사와 특별근로감독 조치가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성우 민주노총 노동법률지원센터 노무사는 "지금도 불법 연장 근로, 공짜 노동 강요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 주 52시간 상한이 과도한 규제라는 주장 자체가 탁상공론"이라며 "산업재해 예방과 일자리 창출을 고려한 정책은 주 52시간제 완화가 아니라 장시간 불법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포괄임금제 폐지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맹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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