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쌓지 않는 게 적폐청산이다

입력
2022.03.10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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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누구도 선택받지 못한 선거
적폐청산 보복은 현 정권 실패 답습
지금 당장 할 일은 국민통합과 협치

어느 쪽이 이기든 이런 양상만은 만들어지지 않길 바랐다. 어찌 보면 이건 최악이다. 가뜩이나 울화 끓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정치적으로는 분명하게 차이가 벌어지는 게 나았다. 결과를 심정적으로도 선선히 받아들이고 선거의 의미와 명분을 확실하게 세우려면.

분명히 말하건대 이번 대선의 승자는 없다. 누구도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 때문이다. 더욱이 정권교체론이란 기본 밑천을 10%나 까먹은 윤석열 당선인 입장에선 면구스러운 결과다. 이 정도 표차에서는 패자 쪽의 누그러지지 않는 적개심으로 허니문 기간 따위의 아량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당선인에게 다른 한가한 주문을 할 상황이 아니다. 첫째도 둘째도 오직 통합과 치유다. 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권의 미래도, 국가의 앞날도 없다. 당선인부터 엄혹한 국면임을 인식해야 한다.

집권 초기 80%에 달하는 절대적 지지를 얻고 국회를 독점하다시피 질주하던 문재인 정권의 실패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됐음을 상기할 일이다. 문 대통령의 취임사가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 안에 담긴 ‘통합과 공존’ 선언 때문이었다. 관용과 소통의 정치문화가 처음으로 싹을 틔우리란 부푼 희망이 무너지기까지는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 정권에서 모든 사안은 진보와 보수, 내 편 네 편의 격렬한 싸움으로 치환됐고, 이 과정에서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70%의 국민은 청산돼야 할 적폐세력으로 몰리거나 국외자로 버려졌다. 그 갈라치기의 수단으로 남용된 ‘내로남불’은 신영어단어(Naeronambul)로도 쓰이는 부끄러운 상징어가 됐다. 앞서 박근혜 정권의 통치동력 상실, 나아가 실패원인도 크게 보면 배제와 적대였다.

가까이는 문 대통령이 그랬듯 당선 직후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은 전임들의 상투어였다. 사실상 문 정권 심판론, 정권교체론에만 전적으로 기댔던 윤 당선인에게서는 더더욱 믿기 어려운 말이다. 당장 법적으로 결론 내야 할 대장동, 도이치모터스 의혹 등 민감한 고발사건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원전 평가조작과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등 보수진영에서 칼을 갈아온 사건들도 재발화할 소지가 크다. 하나같이 윤 당선인의 공정과 상식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사안들이다. 이 난제들을 돌파해 정말로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는 방법은 어렵지만 간단하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법과 원칙의 균형적 사용이 그것이다.

나아가 더 부연하자면 문 정권의 실패한 언어인 적폐청산을 윤 당선인은 혹여 입에 올리지 말기 바란다. 물론 정확히 윤 당선인이 쓴 용어는 아니나 유세기간 시종 결기에 찬 표정과 분노의 언어는 그대로가 적폐청산의 선언이다. “국민 약탈, 무도한 행태, 독재와 전제, 망상, 기만, 씻을 수 없는 죄….” 진정으로 적폐를 청산하는 길은 단 하나다. 스스로 더는 적폐를 쌓지 않는 것이다.

취임 후 곧바로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고, 머지않아 한창 일할 시기에 결정적으로 정권의 명운을 가를 총선도 기다리고 있다. 그야말로 간발의 표차로 정권을 놓친 반대진영과 지지자들은 이를 갈며 권토중래를 노릴 것이다. 선거에서 윤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은 60% 이상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는 말이다.

어렵사리 정권교체는 이루었으나 기실 그 내용은 이재명 후보의 말마따나 정치교체가 돼야 한다. 전 정권의 적폐청산이 아닌, 적대와 배제의 정치문화를 거두고 통합과 협치, 공정과 상식을 세우는 것이 정치교체의 핵심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간절한 시대적 기대에 곧바로 부응해줄 것을 믿으며 조심스러운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이준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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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한국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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