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권력, 몰랐다는 변명은 그만"

입력
2022.01.20 16:00
15면

강화길 소설 '음복'과 미투 가해자 옹호 발언에 대하여

편집자주

차별과 갈등을 넘어 존중과 공존을 말하는 시대가 됐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모색한다, 공존’은 다름에 대한 격려의 길잡이가 돼 줄 책을 소개합니다.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17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부인 김건희씨의 녹취 보도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뉴시스

17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부인 김건희씨의 녹취 보도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뉴시스

폭력의 위협이 지속되면 폭력을 포착하는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다. 위협을 감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어조를 살피고 얼굴 표정과 몸짓을 읽는 데 능해진다. 학대하는 사람의 요구와 그의 화를 유발하는 지점을 직관적으로 인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조절한다. '가난 사파리'(돌베개 발행)의 저자 대런 맥가비는 어머니와 공동체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과잉각성 상태에 놓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일상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폭력을 인지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체득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른다'는 권력이다.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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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소설집 '화이트 호스'에 수록된 소설 '음복'은 그늘이 없는 미소를 가진 남자와 결혼한 여자의 시점에서 제사 풍경을 담아낸다. 세나는 남편 정우의 미소가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심한다. 그는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조부모도, 늘 어머니와 세나에게 시비를 거는 고모의 행동도 감지하지 못한다. "애는 언제 낳을 거냐"라며 예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고모를 "진중하고 속이 깊으신 분"으로 묘사했을 정도다. 정우의 미소는 무지의 권력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정우에게 그 권력을 준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가족 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면서 가부장제를 지탱한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던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날,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제발 꺼지라고"를 외치며 상을 엎는다. 상에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토마토 고기찜이 놓여 있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평범한 식사를 거부한 그는 "아내가 만들 수 없는 음식, 먹고 싶지 않은 음식, 함께 먹을 수 없는 음식"만을 요구했다. 할아버지의 요구에 맞춰 토마토 고기찜을 개발한 것은 며느리인 정우의 어머니였다. 그는 아들 정우가 아무것도 모른 채 할아버지와 토마토 고기찜을 좋아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모름'은 세나가 자신의 어머니와 외삼촌의 갈등을 지켜보았던 경험과 비교된다. 세나는 외삼촌을 편애해서 어머니를 울렸던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외사촌과의 우애를 거절했다. 딸은 눈치챘지만, 아들은 몰랐다. 몰라야 했다. 세나는 조용히 되뇐다.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재직 시절 비서실에서 2년간 근무했던 이대호는 2020년 10월 한 일간지 기고를 통해 "저는 비서실에서 일하는 동안 고인이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팀의 실패였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좋은 사람이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은 그들이 무지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만두지 않았냐', '합의한 거 아니냐' 등 다양한 2차 가해가 선한 미소를 가진 사람들의 입에서 쏟아진다. 이는 폭력의 구조 안에 놓인 피해자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피해 생존자 김지은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구조에서 벗어나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지사님이랑 합의를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지사님은 제 상사이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그런 사이입니다"라는 김지은의 말은 일상적 폭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말로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모르는 자의 위치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 한 대선 후보의 아내가 기자와 나눈 대화가 공개되었다. 미투(Me Too·성폭력의 사회적 고발) 운동을 폄훼하고 피해자를 가해하는 말로 가득했다. 그는 피해자들의 외침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김지은은 입장문을 내고 "당신들이 세상을 바꿔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노력에 장애물이 되지는 말아주십시오"라고 밝혔다. 몰랐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장애물이 아니라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화이트 호스·강화길 지음·문학동네 발행·300쪽·1만3,500원

화이트 호스·강화길 지음·문학동네 발행·300쪽·1만3,500원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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