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이 떠난 뒤... 남겨진 소녀들은 싸우고 또 싸웠다

입력
2022.01.20 13:43
수정
2022.01.20 14:1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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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개봉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

1970년대 10대 여공이었던 임미경(왼쪽부터), 신순애, 이숙희씨는 60세 언저리에 과거를 돌아보며 추억에 잠긴다. 플라잉타이거픽처스 제공

1970년대 10대 여공이었던 임미경(왼쪽부터), 신순애, 이숙희씨는 60세 언저리에 과거를 돌아보며 추억에 잠긴다. 플라잉타이거픽처스 제공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몸을 불사르고 떠난 이야기는 누구나 안다.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다. 평화시장 피복 노동자의 권익을 지켜줄 울타리가 생긴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전태일 생전 눈에 밟히곤 하던 어린 여공들의 삶은 나아졌을까.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라는 문구가 적용되지 않는다. 청계피복노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태일 신화에만 주목하고, 이후 이야기엔 눈길을 잘 내주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은 세간의 시선에서 비켜 있었던 전태일 이후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의 남달랐던 삶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들의 싸움은 계속됐다

'미싱타는 여자들'의 출연자들은 1977년 노동교실 수련회로 찾았던 동해를 다시 방문해 달고도 씁쓸했던 옛 시절을 곱씹는다. 플라잉타이거픽처스 제공

'미싱타는 여자들'의 출연자들은 1977년 노동교실 수련회로 찾았던 동해를 다시 방문해 달고도 씁쓸했던 옛 시절을 곱씹는다. 플라잉타이거픽처스 제공

청계피복노조 설립 직후 사용자와 정부는 우호적이었다. 1972년 정부는 노동자들이 배움의 기회를 갖도록 노동교실 설립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교실 운영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당국은 노동교실 개소 초청장에 자주색 글씨를 사용한 것만으로도 사상이 불순하다며 문제 삼았다. 당국과 사용자는 이후에도 줄곧 노동교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노동교실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학교이자 사랑방이었다. 진학 대신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던 어린 여공들에게는 더욱 소중한 장소였다. 동년배와 교류하며 글을 깨우치고 세상 사는 법을 알아가는 곳이었다.

1977년 큰 위기가 닥친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1929~2011) 여사가 평화시장 노동쟁의와 관련 법정 모독죄로 구속되면서 노동교실은 벼랑 끝에 몰린다. 노동교실이 입주한 건물의 주인이 퇴거를 요청해서다. 노동자들은 당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판단한다. “꽥 소리라도 한번 내보자”는 생각에 점거 농성에 나선다.

소녀공들은 울지 않는다

임미경씨가 노동의 힘겨움을 담아냈던 자작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플라잉타이거픽처스 제공

임미경씨가 노동의 힘겨움을 담아냈던 자작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플라잉타이거픽처스 제공

다큐멘터리는 1970년대 평화시장 여공이었던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씨의 회고를 토대로 노동교실 점거 농성 전후를 되짚는다. 세 사람은 명절을 앞두고 수출 물량을 대기 위해 15일 가까이 잠을 못 자고 미싱을 돌려야 했던 사연, 노동교실 안팎에서 동료들과 쌓은 추억, 부당했던 공권력 등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그들의 술회는 202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믿기 힘들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10대임에도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인 교통비를 지불해야 했던 일은 약과다. 그들은 점거 농성 후 경찰에게 얻어맞아 고막이 터지거나 “여공인 너희가 데모를 아냐”라고 괄시를 받는다. 구속자의 ‘신분’에 따라 차별이 있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사식을 받을 수 있었으나 여공들에게는 금지됐다. 경찰은 조서에서 임미경씨의 생년을 바꾸기도 했다. 임씨를 소년원이 아닌 교도소로 보내기 위한 조작이었다. 임씨는 교도소 생활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창살을 통해 별도 보이고 달도 보이고 눈도 보였다”고.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게 희망”이었고 “누군가 또 죽으면 다시 또 잘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이답게 의연하다.

상처 어린 과거를 긍정하다

옛 일터 청계상가를 찾은 1970년대 소녀공들이 노래 '흔들리지 않게'를 함께 부르고 있다. 플라잉타이커픽처스 제공

옛 일터 청계상가를 찾은 1970년대 소녀공들이 노래 '흔들리지 않게'를 함께 부르고 있다. 플라잉타이커픽처스 제공

세 사람은 육십 언저리가 되도록 주변에 과거를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의기로 행동했다가 재판받고 실형까지 산 일들이 아이들에게 누가 될까 봐서다. 영화는 이런 점에 주목하며 기존 다큐멘터리와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전적이 화려한 과거”와 “억울하고 아픈 기억”을 소환한다.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시절 찍었던 사진을 바탕으로 아름다웠던 청춘을 캔버스에 재현하고, 옛 일터였던 청계상가에 옛 사진들로 전시장을 꾸민다. 세 사람이 온당하게 과거와 마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옛 노동현장을 찾은 세 사람은 웃으면서 울먹인다. “참 잘 살았다. 지금도 잘 살고 있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경제발전의 숨은 주역이었으면서도 빨갱이로 내몰렸던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긍정한다. 영화 속 가장 빛나면서도 영화의 기획 의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장면만으로도 영화는 가치를 드러낸다. 이혁래·김정영 감독. 20일 개봉, 전체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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