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거리에서 추행당한 트라우마... 한국이 무서워 떠납니다"

입력
2022.01.14 04:30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 공동기획>
외국인 여성 노린 성폭력 빈발… 신고도 어려워
"사후대처 미흡 노린 범죄… 외국인 편견도 영향"

몇 해 전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미국인 제니퍼(30·가명)씨. 코리아타임스

"제 옆에 앉더니 제 다리를 만지면서 태연하게 휴대폰을 보더라고요."

한국에 3년 가까이 거주한 아일랜드인 린다(36·가명)씨는 1년 전 그날의 기억만 떠올리면 지금도 끔찍하다.

지난해 2월 밤늦게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던 린다씨의 옆자리에 60대 중년 남성이 앉았다. 텅 빈 자리를 두고 굳이 린다씨에게 붙어 앉은 이 남성은 이내 신체 접촉을 하다가는 자신의 휴대폰을 린다씨 다리 위에 올려놨다. 휴대폰에선 음란물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린다씨는 "그 순간 얼어붙어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며 "맞은편 창문에 내 모습이 비쳤는데, 그 남자도 창문을 통해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린다씨가 목적지인 신촌역에서 내리자 누군가가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옆자리 남성임을 직감한 그는 "제발 내버려 두라"고 외치며 출구 계단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역사 밖으로 나가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거리엔 경찰도, 도움을 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린다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고도 못 했다고 한다.

외국인 성범죄 매년 1000건 육박

외국인 대상 성폭력 발생 추이와 2021년 발생 성폭력 유형. 경찰청, 그래픽=송정근 기자

외국인을 겨냥한 성폭력 범죄가 빈발하고 있다. 국내 사정에 어둡고 의사소통에도 서투른 '사회적 약자'를 겨냥한 범죄로, 해마다 900건을 넘던 범행 건수는 코로나19 유행에 따른 범죄 감소 추세에도 매년 700건 이상 발생하고 있다. 외국인 대상 성폭력은 피해 당사자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기는 범죄일뿐더러 한국의 대외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라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경찰이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통계에 따르면, 외국인 상대 성폭력 범죄는 2017년 938건, 2018년 980건, 2019년 924건 등 매년 1,000건에 육박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외국인 유입이 줄어들면서 소폭 줄긴 했지만 2020년 747건, 지난해 727건(잠정치)으로 여전히 연간 700건 이상 발생하고 있다. 피해를 보고도 신고하지 못한 사례까지 감안하면 실제 발생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범죄를 유형별로 보면 △강간·강제추행 554건 △카메라 등 이용 촬영 124건 △통신매체 이용 음란 42건 △성적 목적 공공장소 침입 7건이다.

캐나다에서 온 로라(26·가명)씨도 2020년 7월 대구에서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끌려가 강제추행을 당했다. 길거리에 서 있다가 당한 일이었다. "제가 안 좋은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리려고 행인들과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군요." 그를 룸식 술집으로 데려간 남자는 강제로 음식과 술을 먹이고 몸을 더듬었다. 로라씨는 "그 남자는 내 속옷 안으로 손까지 넣었다"며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제지당했다"고 말했다. 남자를 겨우 뿌리치고 휴대폰과 가방을 챙겨 도망쳐 나오는 과정에서 로라씨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촌·홍대 등 번화가에서 범행 빈발

미국인 패트리샤(34·가명)씨가 화상 인터뷰에서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코리아타임스

외국인 여성들은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자행된다고 호소한다. 그저 길거리를 걷는 와중에도 누군가 따라오거나 취객에게 붙들리는 등 불쾌한 일이 빈발한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신촌, 홍대 등 번화가에서 이런 피해가 잦다는 것이 이들의 경험담이다.

미국에서 온 제니퍼(30·가명)씨는 홍대 근처에 살면서 강제추행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는 "한국인 남성이 신체 접촉을 하려 드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가 물건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며 "한 남성이 팔을 잡으며 이야기 좀 나누자고 해서 강하게 거부했는데도 놔주지 않아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제니퍼씨는 이런 일을 자주 겪어 불안장애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는 "외국인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고 토로했다.

미국인 패트리샤(34·가명)씨가 몇 해 전 한 남성에게 쫓기다가 폭행을 당한 곳도 홍대 부근이었다.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탔던 그는 누군가 자신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과 함께 홍대입구역에서 하차하던 패트리샤 일행은 패닉에 빠졌다. 남자가 따라 내리더니 도망가는 두 사람을 쫓아온 것이다. 역 출구 밖으로 나오려는 찰나, 이 남자는 패트리샤씨를 덮쳐 성행위를 하는 시늉을 하며 목까지 졸랐다. 친구가 남자를 넘어뜨리면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패트리샤씨에게 그날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너무 무섭고 한국말도 할 줄 몰라 신고를 못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 사건을 떠올리며 말해줄 때마다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외국인은 개방적' 편견도 범행 부추겨

아일랜드에서 온 린다(36·가명)씨가 줌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성폭력 피해를 증언하고 있다. 코리아타임스

국내에서 외국인 대상 성폭력이 빈번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외국인은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고 치안 제도를 잘 몰라 사후 대처가 미흡하다는 점과, 외국인 여성은 한국 여성보다 성적으로 개방돼 있다는 편견이 퍼진 점이다. 린다씨는 "외국인이라 변호사도 선임하지 못할 거란 생각들을 하니까 더욱 (범죄) 목표물이 되는 것 같다"며 "한국에 가족이 없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으니 더욱 무기력해진다"고 말했다. 패트리샤씨는 "적잖은 한국 남성들이 '외국인 여성은 성적으로 개방됐다'거나 '한국 여자는 다가가기 무섭다'는 생각으로 외국인에게 접근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들 피해자에게 한국은 안전하지 않은 나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일부는 한국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린다씨는 "영국, 미국,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살아 봤지만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며 "언어 문제와 외국인 여성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올해 안에 한국을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윤한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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