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딛고 만들어낸 아름다움

입력
2022.01.07 04:30
15면

백희나 그림책 '연이와 버들 도령'

편집자주

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얼마 전 아는 어린이가 학원 시험 성적 때문에 크게 낙담한 사연을 전해 들었다. "못할 수도 있지. 괜찮아!" 하는 엄마의 위로에도 어린이는 "엄마는 시험도 붙었고 회사도 다니잖아. 나는 못할 것 같아. 어떡해…" 하고 울먹였다. 당황한 엄마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실패를 했는지를 자세하게 읊어 주어야 했다. 어른들은 "어린이가 무슨 걱정이 있냐"고 쉽게들 말하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어디를 가도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이 시대에 어린이가 가진 불안의 크기는 어른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이의 세계는 환한 빛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어린이들은 유쾌하고 희망 가득한 이야기를 좋아할 거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걸작으로 평가받는 동화나 그림책에는 작은 몸으로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 모진 시련과 고난, 헤어짐과 죽음 같은 어둡고 슬픈 이야기도 많다.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으로 잘 알려진 미국 동화작가 케이트 디카밀로는 '어린이책이 조금은 슬퍼야 하는 이유'라는 언론 기고에서 슬픔과 상처를 딛고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위안이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자신 또한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항상 병약한 아이로 자랐던 경험이 없었더라면 어린이들의 마음을 위로할 줄 아는 어른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백희나 작가가 눈 쌓인 전국의 산속을 헤매 다니며 만들어 낸 그림책 '연이와 버들 도령'은 최근 몇 년 동안 보았던 어린이책 중에 손에 꼽을 만큼 슬픈 책이다. 차디찬 눈밭의 감촉이 전해지는 서늘한 배경이 슬프고, 어이없는 명령에도 반항 한번 못하는 연이의 오갈 데 없는 처지가 슬프고, 도술을 쓸 줄 알지만 악의를 가지고 달려드는 어른에게 덧없이 죽임당하는 버들 도령의 연약함이 슬프고, 불행과 고통에 익숙해져 버린 연이의 공허한 눈빛이 무엇보다 슬프다.

옛이야기로 전해지는 '연이와 버들 도령'은 엄동설한에 나물을 뜯어 오라는 계모의 명령을 받은 연이가 신비한 동굴에 사는 버들 도령을 만나 시련을 극복하고 행복해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백희나 작가가 새롭게 해석한 '연이와 버들 도령'에서 연이를 괴롭히는 것은 계모가 아니라 '나이 든 여인'이고, 연이와 버들 도령은 사는 곳과 차림새가 다를 뿐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다른 모습을 상징하는 설정이다.

한겨울에 상추를 찾아 눈 속을 헤매던 연이는 죽음의 위기를 느끼고는 마지막 힘을 모아 무거운 돌문을 열고 동굴로 들어간다. 환하고 따뜻한 그곳에서 버들 도령을 만난 뒤부터 연이는 달라진다. 나이 든 여인의 구박에도 주눅 들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그전까지 맥없이 아래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조금씩 높은 곳을 향한다. 심지어 버들 도령을 만나러 몰래 외출까지 한다.

하지만 곧 비극이 닥친다. 이 책에서 가장 슬픈 장면 가운데 하나는 버들 도령의 죽음 앞에서 "연이에겐 그동안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거든. 그래서 이런 기막힌 일이 닥쳤어도 그래, 그러려니 싶은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그리운 순난앵'이라는 작품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부모를 잃고 남의 집에서 고된 노동으로 삶을 이어 가는 마티아스와 안나 남매는 "앞으로는 우리한테 재미있는 일이 단 한순간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라고 울먹인다.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를 비롯한 유쾌한 작품들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린드그렌도, 한국의 대표적인 그림책 작가로 사랑받고 있는 백희나도 사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을 겪었다. 두 사람 모두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어린이 독자들에게 세상의 진실을 전해 줄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 아닐까. '그리운 순난앵'과 '연이와 버들 도령'에서 두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희망은 춥고 어두운 곳을 지나 스스로 무거운 돌문을 열고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도 어디엔가 '순난앵'이 있고 '버들 도령'이 있을 테니 부디 다들 잘 버티어 내기를… 백희나 작가가 가장 지쳐 있었을 2020년 봄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을 받았다는 것, 그 뒤에 내놓은 작품이 '연이와 버들 도령'이라는 사실이 왠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연이와 버들 도령'은 책장 사이사이에서 상상할 수 있는 여백도 정말 많은 그림책이다. 나이 든 여인과 연이는 과연 어떤 관계였을지, 나이 든 여인이 '천벌'을 받지 않고 외롭게 살다 죽은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지에 대해서도 길고 긴 이야기 하나씩을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차갑고 슬프고 아름다운 올겨울 필독 그림책이다.

연이와 버들 도령·백희나 지음·책읽는곰 발행·88쪽·1만8,000원

연이와 버들 도령·백희나 지음·책읽는곰 발행·88쪽·1만8,000원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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