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어떻게 그린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달라질까

입력
2021.12.30 19:00
25면

시대착오적인 이미지 메이킹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 1787년, 271 x 195 cm, 베르사이유 트리아농 궁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 1787년, 271 x 195 cm, 베르사이유 트리아농 궁

지난주 윤석열 대선후보의 부인 김건희 씨가 자신의 허위 이력 의혹에 대해 사과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 씨의 기자회견이 끝난 후 각계각층에서 열띤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겠으나, 필자는 그날 그의 모습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선전용 초상화가 오버랩되었다. 현모양처 어머니로 코스프레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린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Élisabeth Vigée Le Brun)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총애한 18세기 유럽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그는 뛰어난 수완과 사교성, 실력으로 왕비의 신임뿐 아니라, 귀족계층, 배우, 작가 등 다양한 후원자들의 호감을 얻어 당대 미술계에서 승승장구했다. 비제 르 브룅은 딱딱한 초상화의 전통을 깨고 모델에게 자신이 고안한 자연스럽고 세련된 자세를 취하게 했고, 외모의 결점을 가리고 이상화하여 의뢰인들을 만족시켰다. 루벤스와 반 다이크를 연상시키는 감각적이고 찬란한 색채의 구사는 그의 작품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화가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여왕이자 패셔니스타, 자애로운 어머니 등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묘사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 사교계의 중심에 서서 무도회와 파티를 열었으며 귀족 여성들의 패션을 선도했다. 그는 날씬하고 예쁘장한 외모에 성격이 활달하고 상냥해서 처음에는 프랑스 국민의 사랑을 받았으나, 점차 방탕한 파티와 유흥, 사치품 구입, 도박 빚, 불륜 등의 추문에 연루되면서 비판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젊은 시절 한때의 경솔한 처신을 뉘우치고 바른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사치와 부패로 얼룩진 왕실의 상징이 되어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프랑스는 절대왕권 붕괴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의 격동기였고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가 극에 달했다. 사람들은 이 총체적인 난국이 많은 부분 마리 앙투아네트의 탓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온갖 부당한 중상모략의 화살받이가 되어야 했다. 근래에는 그를 정치적 희생양, 여성혐오의 희생자로 재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왕비로서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했으며,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무지하고 미성숙했던 것도 사실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람들의 고통과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인간적 취약함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왕비라는 공적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삶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왕비의 절친한 동갑 친구이자 측근이었던 비제 르 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이들'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던 그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림에서 왕비는 자녀들에 둘러싸여 자애롭고 훌륭한 모성을 가진 어머니로 묘사되어 있다. 화가는 거룩한 어머니의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성모자상의 피라미드 구성을 사용했다. 이 그림 속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전의 프릴 장식의 화려한 드레스, 과하게 부풀린 가발,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초상화들과는 달리, 보석을 하지 않았으며 질감이 잘 묘사된 붉은색 벨벳 드레스도 비교적 소박하다. 그림이 완성될 무렵 막내인 소피 공주가 사망했는데, 화가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보여주어 대중의 동정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빈 요람으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화가의 의도와 다르게 왕비의 표정은 별로 슬픈 표정이 아니어서 사람들에게 나쁜 어머니의 이미지마저 주었다. 결과적으로 왕비를 현모양처로 보이게 하려는 화가의 노력은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위선적으로 모성을 과시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건희 씨는 기자회견에서 느리고 나긋나긋한 어조, 조신하고 다소곳한 태도로 현모양처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과문 내용 역시 봉건사회의 전통적 여성의 화법이었다. 대권을 향한 남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된 자신을 죄인이라고 탓했고 아이를 유산한 것에 대해서도 남편에게 미안하다며 자책했다. 유튜브나 언론과의 인터뷰 육성을 통해 접한 김 씨는 빠르고 거침없는 말투와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자부심이 넘쳤는데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많은 이로부터 자신의 허위 경력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 이미지를 잠재우고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급조된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수정 교수나 신지예 씨 등 주변 인물들이 페미니즘을 방패막이로 하여 김 씨에 대한 비난을 '여성혐오', '마녀사냥'이라며 열심히 방어할 때, 정작 본인은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현모양처 이미지를 자처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김 씨의 사과 장면에 달달한 발라드를 깔아 편집한 영상이 조회수 100만을 넘겼다고 한다. 부정적 여론의 징후다. 프랑스 혁명 시대의 국민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이미지를 믿지 않았듯이, 김건희 씨의 현모양처 이미지의 사과도 사람들에게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 같다. 진정성은 언제나 최상의 전략이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대체텍스트
김선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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