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축구 이야기를 싫어한다고요? 우린 밤을 새울 수도 있어요"

입력
2021.12.30 16:17
수정
2021.12.30 16:34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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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축구 동호회 ooofc 인터뷰
"축구로만 맛볼 수 있는 짜릿함"에
학창 시절 '취미 단절' 딛고 동호회 활동
'골때녀' 인기에도 인프라는 아직 부족
"손쉽게 축구 하는 날 빨리 왔으면"

여자축구 동호회 ooofc 멤버들이 22일 연습 경기에 앞서 기합을 넣고 있다. 배우한 기자

여자축구 동호회 ooofc 멤버들이 22일 연습 경기에 앞서 기합을 넣고 있다. 배우한 기자

"여자들이 축구 이야기를 싫어한다고요? 우리는 축구로 밤을 새울 수도 있어요!" 영하의 한파가 덮친 12월 22일 밤, 유니폼을 갖춰 입은 여자들이 서울 서초구 양재근린공원 운동장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몸을 푸는가 싶더니 어느새 꽁꽁 언 축구장을 열기로 가득 채웠다. 생업을 끝내고 축구를 위해 모인 ooofc(Out Of Office Football Club) 멤버들이다.

ooofc는 올해 초 결성된 여자축구 동호회다. 공기업이나 스타트업에 다니는 회사원부터 간호사, 체육 선생님까지 다양한 직장의 20~30대 여성들로 구성됐다. 직업만큼이나 축구에 얽힌 이야기도 다양하다.

스포츠 관련 스타트업 회사에 다니는 김가은(26)씨는 삶의 중심에 축구가 있다.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유명한 축구광이었다. 전교생이 60명에 불과한 강원도 시골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나와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섞여 공을 찼다. 여자축구부 제안도 받았다. 어머니의 식당엔 팬을 자처하는 군인 아저씨들이 놓고 간 축구공 등 군 보급 축구용품이 쌓였다. 학교 선생님은 운동에 소질이 없는 남학생에겐 꼭 그를 들먹이며 "너는 남자가 가은이보다 공을 못 차냐"고 했다. "저는 그런 시선을 약간 즐겼던 거 같아요. '어떻게 여자가 축구를 해?' 하는 게 약간 뿌듯한 아이템이지 않았나 싶어요."

축구 유튜브를 운영하는 임선영(24)씨는 어릴 적 아버지와의 공놀이가 축구에 대한 흥미로 이어진 케이스다. 초등학교 때까진 남자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했지만, 중학교 때부터는 기회가 사라졌다. TV 속 박지성과 게임으로 대리 만족을 해야 했던 그의 축구 갈증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해 여자축구 동아리를 만나고 나서야 해소됐다. 김씨도, 임씨도 이젠 일주일에 최소 두 번 꾸준히 공을 찬다.

ooofc의 김가은(왼쪽)씨와 임선영씨가 2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ooofc의 김가은(왼쪽)씨와 임선영씨가 2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한국에서 여자가 축구를 하는 것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우선 팀을 꾸리다가 진이 빠진다. "모여라" 하면 금방 팀이 만들어지는 남자들과 사정이 많이 다르다. "제가 중학교 때 체육부장이었거든요. 하루는 너무 축구를 하고 싶어서, 여자 애들을 하나씩 붙잡고 '너 축구 하고 싶지' '너 축구 하고 싶어' 주문을 건 다음에 체육 선생님께 가서 '얘들이 축구 하고 싶대요' 말했어요. 겨우 반 대 반 대항전을 했지요."(김가은)

거창하게 축구클럽까지 결성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에게 축구는 매우 적극적으로 사수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리기 쉬운 취미다. "대학 다닐 때는 동아리가 있었는데 졸업하고 나니까 다시 (축구를 할 수 없던) 학창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어요.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 동호회를 만들게 됐어요."(임선영)

처음 공의 맛에 빠진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소원은 하나다. 쉽게 축구를 하는 것이다. 다행한 건 요즘 들어 축구에 입문하는 여자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예능 프로그램 '골때리는 그녀들'의 인기 덕분이다. 여자축구에서 가장 어렵다는 '팀 만들기'가 조금은 쉬워질 분위기다. 임씨는 "예전에는 대부분 알던 친구들이었는데, 요즘에는 확실히 처음 보는 이들이 많다. 축구 한 지 얼마나 됐냐 물어보면 '한두 달밖에 안 됐다'는 답이 돌아온다" 했다.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도 '축구를 하고 싶은데 어디에 가면 배울 수 있냐'는 질문이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여자축구 동호회 ooofc 멤버들이 22일 연습 경기에 앞서 몸을 풀고 있다. 배우한 기자

여자축구 동호회 ooofc 멤버들이 22일 연습 경기에 앞서 몸을 풀고 있다. 배우한 기자

나름의 에피소드도 생겼다. 김씨는 "딸의 축구에 별 관심이 없던 아버지가 자꾸 '너네랑 쟤네랑 하면 누가 이기냐'고 묻는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임씨는 어릴 적 유행했던 예능 '날아라 슛돌이'를 떠올렸다. "왜, 그때에도 축구 하는 여자 아이가 한 명 있었잖아요. 그런데 열심히 한다기보다는 약간 칭얼대는 캐릭터였어요. 어릴 때 그걸 보면서 '축구는 사수해야 하는 취미가 아닌 건가' '다른 걸 찾아 봐야 하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 게 꼭 아닌 거잖아요."

아직 아쉬움은 있다. 학교마다 있는 게 축구 골대라지만 소속 없는 동호회가 축구장 빌리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공공시설인 축구장은 관내 팀에 우선 배분되는데, 자치구 내에서 여자축구 멤버 22명을 모으기는 아직 쉽지 않다.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생활체육이 축구라지만 그건 남자들만의 이야기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축구만이 주는 짜릿함 때문이다. "공동체적 부분이 재밌는 것 같아요. 내가 못 넣어도 다른 친구가 넣고, 누구든 넣으면 우리 팀이 잘하는 거잖아요. '우리'라는 조직이 이기는 기분이 좋아요."(김가은) "네다섯 명이 마음 맞기도 어려운 게 삶인데 축구를 하면 11명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움직이는 순간이 오거든요. 승패가 갈리는 경험도 그렇고, 인생에서 쉽게 맛볼 수 없는 희열인 것 같아요."(임선영)


최동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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