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과 빚

입력
2021.12.25 04:30
22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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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사고팔 때, 우리는 ‘값’을 중요하게 본다. 그리고 그만큼 가치가 있으면 ‘값어치’가 있다고 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더 선호한다. 물론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도 많다. 식구, 오랜 벗, 삶, 행복, 성취감 등은 천금과도 바꾸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물건 값이 높거나, 사람을 쓰는 데 드는 비용이 보통보다 높은 것을 ‘비싸다’고 한다. “경험은 인생에서 가장 큰 스승이다. 다만 그 값이 비쌀 뿐이다”라고 한 토마스 칼라일의 격언에서 보듯, 일의 대가가 보통을 넘을 때도 비싸다고 말한다.

‘비싸다’의 반대말은 ‘싸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옛말에서는 ‘비싸다’도 ‘싸다’도 둘 다 그 값이 된다는 뜻이었다. 옛말에 ‘싸다’는 ‘무엇이 어떤 값에 해당한다’는 말이었다. 지금도 ‘지은 죄로 보면 욕먹어 싸다’에서 보듯, ‘싸다’는 저지른 일에 비추어 받는 벌이 마땅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15세기에 ‘싸다’는 주로 ‘빋’과 함께 쓰여, ‘빋싸다’로 종종 나타난다. 옛말 ‘빋’은 ‘값, 가치’를 뜻하는 말이며, ‘빋싸다’란 ‘그 값에 달하다’는 말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비싸다’에 이른다. ‘비싸다’에는 이미 값, 가치 있음 등의 뜻이 충분히 있는데, 현대 국어에서는 이조차도 더욱 강조하는 ‘값비싸다’란 말을 쓴다. 참으로 값이 최상인 시대이다.

그런데 옛말 ‘빋’에는 ‘값’과 ‘가치’만 있는 게 아니다. 남에게 지는 ‘빚’도 같은 말인 ‘빋’을 썼다. 칼날에는 양면이 있다고 했던가? 칼날의 한 면은 나를 지키나, 다른 한 면은 나를 해친다. 사람은 누구나 값이 높은 것을 좋아하지만, 값이 높을수록 빚을 지기도 쉽지 않을까? 값에 대응되는 돈을 내지 못하는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빚을 지기 때문이다. 함정은 돈으로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들이 잘 청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연말에 열두 달을 돌아보면 귀한 경험이 쌓여 뿌듯한 면이 없지 않다. 동시에, 그 365일은 값어치 있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아온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값어치를 알기에 제값을 소홀하지 않게 치렀을 것이다. 그런데 값의 이면에 있는 빚도 제대로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급할 때 받은 도움, 때로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채기를 낸 많은 말들로 온통 빚지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남에게 진 빚을 정산할 시간으로 2021년 마지막 한 주가 남았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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