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정석도 따라잡겠다"...코로나 불황에 '경제경영서' 역대급 인기

입력
2021.12.19 09:00
1980년 개점 교보문고 경제경영서 점유율 첫 1위
2021년 경제경영 도서판매 점유율 8.5%
종합 베스트셀러 100위 내 22권...소설과 공동 1위
진보정부때는 재테크, 보수정부때는 경제정의
"내년 대선 이후 또 한 번의 변곡점 올지 주목"

15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경제경영서 관련 코너. 코로나발 불황에 경제경영서가 '역대급 인기'를 얻으며 교보문고 개점 사상 처음으로 판매 분야 1위(참고서 제외)를 기록했다. 고영권 기자


매년 연말이면 대형서점들이 한 해 동안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베스트셀러를 발표합니다. 남들 다 읽은 책이니 이제라도 읽으라는 뜻도 있지만, 많이 팔린 책 목록을 읽다보면 시대가 원하는 '니즈'(필요)를 볼 수 있다고들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올해 대형서점들이 주목한 건 특이하게도 책이 아니라 판매 점유율이 높은 도서 '분야'였습니다.



서점마다 경제경영서 역대 최다 판매

2021년 베스트셀러 분야별 점유율. 교보문고 제공


확고부동한 전 세계 베스트셀러 1위가 성경인 것처럼, 국내 출판시장의 확고부동한 베스트셀러 1위 분야는 소설도, 인문학도 아닌 참고서입니다. '수학의 정석'을 낸 성지출판이 출간 50년을 맞은 2016년 집계한 누적 판매 부수가 대한민국 총인구에 약간 모자란 4,600만 권이었으니 짐작이 가시려나요. 오죽하면 입시업체 1타 강사들의 주 수입원은 강의 수강료가 아니라 강의 교재비란 말이 나오겠습니까.

체급이 다르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에 담긴 '의미'를 알려면 참고서 빼고 단행본만 추려 살펴봐야 하는데요, 통상 소설이나 아동서적이 판매 점유율 1위를 차지하죠. 한데 참고서 뺀 점유율 1위 분야가 올해 바뀌었으니, 바로 경제경영서라는 겁니다.

18일 교보문고가 집계한 '2021 연간 종합베스트셀러 결산'에 따르면 올해 경제경영분야 도서판매 점유율은 8.5%(판매 권수 기준)로 1위(참고서 제외)를 차지했습니다. 1980년 교보문고 개점 이래 처음 있는 일이죠. 아동(8.4%), 인문(7.2%), 소설(7.0%) 분야가 뒤를 이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몰고 온 불황이 역설적으로 경제경영서의 인기를 만들었다는 분석입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코로나19 1년차인 지난해 경제경영분야 저서가 개점 이래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는데, 올해 판매량은 거기서 22% 증가했다"고 하더군요. 지난해 전체 책 판매량 중 경제경영서 점유율(7.5%)은 아동(8.3%), 인문(7.8%)에 이어 3위를 기록했었습니다.

온라인 서점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예스24의 '2021년 도서 판매 동향'에 따르면 전체 도서 판매량 중 경제경영서 점유율은 6.3%로 어린이도서(10.9%)에 이어 점유율 2위(참고서 제외)를 기록했습니다. 역대 처음으로요. 예스24 관계자도 이러더군요. "경제경영 분야 판매량은 지난해 대비 29.0% 증가했고, 그중 '투자·재테크' 분야는 작년 대비 49.3% 증가했다." 이 서점의 지난해 경제경영서 판매 점유율은 △어린이(11.2%) △소설·시·희곡(5.9%) △유아(5.4%)에 이은 4위(5.2%)였습니다. 이 역시 역대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예전 불황과 차원이 다른 경제 열풍

2020~2021년도 종합베스트셀러 100위권 분야별 분포도. 올해는 경제경영서가 가장 많다. 예스24 제공


종합베스트셀러에서 경제경영서가 차지하는 비중도 비약적으로 늘었습니다. 단순히 경제경영 신간이 많이 나와 많이 팔린 게 아니었다는 말이죠.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00위에 랭크된 경제경영서는 2019년 13권에서 지난해 16권, 올해 22권이 포함돼 소설과 공동 1위를 차지했습니다. 올해 예스24 종합베스트셀러 100권 중 경제경영서는 20권, 역시 가장 많습니다.

예전 불황 때는 어땠을까. 과거 수치를 찾아봤습니다. 교보문고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한 2000년대 말부터 경제경영서를 독립된 분야로 분류했다는군요. 개점 초기에는 비소설로, 이후 사회과학 등으로 집계했답니다.

어쨌든 그 시기 경제경영서 판매 점유율은 전체의 6.1%(2007년)에서 5.3%(2009년)였습니다. 판매가 늘면서 분야도 따로 뗐지만, 메인스트림은 아니었다는 거죠. 당시 소설 점유율이 9%, 아동 도서 점유율이 8%대였습니다. 경제경영서의 반짝 인기는 2013년 4.5%까지 줄다가 이후 차츰 반등해 2019년 6.3%, 지난해 7.5%까지 올랐습니다.

2012년도부터 분야별 도서 판매 비율을 집계한 온라인서점 예스24도 비슷합니다. 전체 책 판매량 중 경제경영서가 차지한 비율은 2012년 3.7%에서 2013년 3.4%로 주춤하더니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 동안 4%대를 유지하다 지난해 5.2%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진보정부에서 재테크 ·보수정부에서 장하준 인기

올해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1위를 쓴 염승환(왼쪽) 이베스트투자증권 이사와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유튜브 '삼프로TV' 캡처·한국일보 자료사진


질적인 차이도 큽니다. 2008년 교보문고 경제경영서 베스트셀러 1위는 단연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진보 경제학자로 꼽히는 장 교수는 무분별한 시장주의가 불평등과 경제 불안을 가져와 자본주의 안정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시장을 적절히 규제하고 사회 통합적 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하죠. 성장을 내세운 보수정부에서, 경제 불평등을 우려하는 장 교수의 책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내친김에 최근 20년치 경제경영 베스트셀러만 추려 비교해봤습니다. MB정부 3년차인 2010년 교보문고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2위는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 3위는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였습니다. 이듬해도 장하준 교수의 저서들은 경제경영분야 2위, 7위였고요. MB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에도 장 교수의 신간 '무엇을 할 것인가'가 5위를 기록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1위도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였습니다. 이쯤 되면 보수 정부가 장 교수를 베스트셀러 저자로 만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이 시기부터 경제경영분야 상위권에 '트렌드 코리아' 같은 각종 경제 전망서가 랭크됩니다.

올해는 어땠을까요. 경제경영분야 1위는 교보문고와 예스24 모두 염승환 이베스트 투자증권 이사가 쓴 '주린이가 가장 알고 싶은 최다질문 TOP 77'이었습니다. 상반기 최대 히트작으로 꼽히죠. 예스24 올해 종합베스트셀러 20위 목록을 보면 이밖에도 △'2030축의 전환'(종합 5위), △'트렌드 코리아 2022'(종합 10위), △'메타버스'(김상균 저, 종합 18위) 등이 랭크됐습니다. 종합 20위는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20주년 특별기념판이네요.

지난해 히트작 목록을 보면 이런 경향이 더 뚜렷합니다. '돈의 속성', '존리의 부자되기 습관', '주식투자 무작정 따라하기'가 교보문고 경제경영 베스트셀러 1~3위를 기록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분배와 복지를 내세운 진보정부에서 재테크 도서들이 인기를 끌었다는 말이죠. 노무현 정부에서도 기업이나 돈 관련 책들이 높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국의 부자들'(2003년 종합 6위) '부의 미래'(2006년 종합 7위)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2007년 종합 3위) 등이 대표적이죠.




내년 출판 흐름은? 대선 이후를 봐야 알 수 있어

15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코너에서 한 고객이 주식 관련 서적을 고르고 있다. 고영권 기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내년에도 경제경영서 인기가 계속될까요. 어떤 주제가 주목받을까요. 출판 관계자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출판사마다 '출간 계획'을 세우니 내년 상반기 계획을 보면 흐름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결론부터 말하면, 알 수 없답니다. 구체적으로 '경제경영서 출간은 늘지만 판매로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겁니다.

2008년 교보문고 입사 후 10여 년째 베스트셀러 집계를 담당하고 있는 김현정 대리는 "경제경영은 유행이 강해서 이슈가 되면 한 달 이내에 책이 나오기도 한다"고 말하더군요. 당장 NFT(대체불가토큰)가 각광받으면서 이달에 관련 신간이 쏟아졌고, 1기 신도시 재개발 논의가 시작되면서 관련 책도 나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선트렌드, 후대응'이라는 거죠. 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주목받은 경제경영서 대부분은 전문가가 쓴 것이지만, 하반기에는 재테크에 성공한 일반인 저자가 늘어났답니다. 한마디로 이 분야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는 거죠. 내년에 경제 전문가들이 후속책을 쓰고 일반인까지 가세하면 출간 자체는 늘겠지만, 이게 판매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라는 겁니다. 예스24 김상근 경제경영 MD도 "코로나19로 비대면 근무가 늘면서 내년 경제경영서 출간 계획을 더 알기 어려운데, 12월 말 현재 흐름으로 보자면 재테크·투자 관련 도서가 대부분이고 그중에서도 주식 투자 관련 신간 비율이 높은 편"이라고 하더군요.

다른 전망도 있습니다. 대형출판사 사장 출신인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올해는 경제경영서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느낌"이라며 "고금리 시대로 경제기조가 바뀌면 인기가 다소 사그라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주식 투자서가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한 건 출판계에 발 들이고 처음 보는 풍경"일 만큼 지금의 어마어마한 인기는 저금리 시대 재테크 광풍의 영향일 뿐이라는 거죠. 기존 두 차례 금융위기 때도 재테크 책이 잠깐 유행하다 말았다는 출판 짬밥 '30년 경험'도 이런 전망에 힘을 싣습니다.

어쨌든 경제경영서 인기가 계속될지는 대선 후에야 윤곽이 잡힌다는 게 중론입니다. 장 대표는 "새 정부 경제정책이 나와야 분석을 하든 반박을 하든 전망을 하든 할 텐데, 아직 경제공약 안 내놓은 후보도 있지 않냐"고 말했습니다.

이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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