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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를 아직 모르는 당신은 행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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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현 클래식 평론가가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합니다. 경기아트센터에서 근무 중인 그는 공연계 최전선에서 심층 클래식 뉴스를 전할 예정입니다. 오페라에서 가수가 대사를 노래하듯 풀어내는 '레치타티보'처럼, 율동감 넘치는 기사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천상에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로 이 사람이 내 작곡가다.”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는 구스타프 말러를 처음 만난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평생의 사랑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자, 그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을 순간이었다.
말러는 교향곡 안에 온 세상을 담아내려 했던 작곡가다. 그가 겪은 경험들, 느꼈던 감정들을 재료 삼아 자신만의 거대한 세계를 음악 안에 만들었다. 고요한 밤을 가득 채우는 풀벌레 소리, 여름이 지나감을 아쉬워하는 새들의 울음소리,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천천히 죽어가는 영혼 그리고 천사들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 음악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물론 말러뿐만 아니라, 모든 작곡가가 자신의 온 우주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자신은 죽어도 작품은 세상에 남으니깐. 하지만 말러만큼 다채로운 소리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그려낸 작곡가는 없었다. 말러는 오케스트라가 가진 가능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아니 그 한계를 넘었다. 순수한 기쁨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인간의 모든 감정은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신이 느끼는 어느 감정이라도 말러의 음악과 연결시킬 수 있고, 그 세계 안에서 위로받을 수 있다. 말러의 작품이 더욱 인기를 누리는 이유다.
그렇게 말러 작품에 깊게 매료된 사람들을 ‘말러리안’이라고 부른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말러의 세계를 사랑했고, 영화감독 박찬욱도 말러의 열렬한 팬이다. 또 말러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힘썼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도 빼놓을 수 없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말러의 환생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말러는 언젠간 자신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말은 실현되었다. 이제는 정말 말러의 세상이다. 그가 남긴 9개가 넘는 교향곡들은 무대에 가장 많이 오르는 작품들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교향곡들은 태양계 행성들처럼 모두 제각각의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성질도 덩치도 다르다. 조물주 말러는 이들을 비추는 거대한 태양처럼 존재한다.
내년에도 말러의 작품들은 무대에 오른다. 실제 무대야말로 말러의 우주로 직행할 수 있는 웜홀이다. 우선 KBS교향악단이 봄이 올 쯤, 말러 교향곡 7번을 연주한다. 말러의 작품 중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꼽힌다. 기타와 만돌린의 낭만적인 세레나데가 들리는 한편, 다른 쪽에선 어둠 속에서 위태로운 왈츠가 흐른다. 말러가 생각하는 '밤'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말러 7번은 그런 행성이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말러 교향곡 10번을 연주한다. 말러가 결국 다 그리지 못한 미완성 작품이다. 작품의 완성을 부탁받은 러시아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오직 말러만이 나머지 세계를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쇼스타코비치는 죽어서 천국에 갈 때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가져가고 싶다고도 말했는데, 그 역시 열렬한 ‘말러리안’이었던 것이다. 교향곡 10번은 데릭 쿡에 의해 완성된 판본이 있지만, 작품을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아직도 많다. 행성으로는 분류하기 어려운 명왕성쯤일까.
말러는 딱 110년 전 사망했다. 51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인생은 너무나 짧다. 당연히 신작들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미 남아 있는 작품만으로도 그의 세계를 평생 탐험할 수 있다. 하지만 말러를 처음 알아가면서 느꼈던 엄청난 희열과 경외감만큼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이제 막 말러를 알아갈 사람들이 부러울 뿐이다. 온 우주를 끌어안는 경험, 말러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만나는 순간들, 이런 것들은 음악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아직 이 세계에서 말러를 만나지 않았다면, 말러를 안 들은 귀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당신은 행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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