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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현 동료'의 2차, 3차피해 "나쁜 기억만이라도 지워지길" [일그러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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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약 10평) 남짓 자취방에는 작은 운동 도구 하나 없었다. 장래희망에 '국가대표'를 적어냈던 선수의 방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난 6일 대전 서구에서 만난 철인3종 경기 선수 정지은(24)씨는 "운동은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다"고 했다. 그는 팀 내 가혹행위로 극단적 선택을 했던 고(故) 최숙현 선수의 피해 사실을 증언한 뒤 스포츠계를 떠났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2차, 3차 피해를 호소하고 있었다.
철인3종 경기 유망주였던 정씨도 스포츠 폭력 피해자였다. 2016년부터 3년간 경주시청팀에서 겪었던 폭력은 그의 몸과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그는 지금도 잠들기 전 공황장애와 광장공포증, 우울증 약을 먹는다. 하루 두 번씩 먹던 약을 그나마 1회 다섯 알로 줄였을 뿐이다. 정신적 트라우마는 대전시청으로 팀을 옮긴 뒤에도 그를 괴롭혔고, 결국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운동마저 멈추게 했다.
최근 그가 빌고 있는 소원은 나쁜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소,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때 생각이 종종 떠올라 힘들어요. 그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최면술 등 뭐든지 하고 싶어요." 당시 기억을 더듬더듬 이야기하는 정씨는 어느새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는 선수 시절 셀 수 없이,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주변의 온갖 물건으로 맞았다고 했다. 선배 선수는 후배를 때리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이유까지 만들었다. 한 선배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를 한 대 쳐라. 그래야 내가 너를 때릴 수 있잖아. 이건 정당방위야." 정씨가 주저하자 선배는 다른 선수를 시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씨의 손이 선배의 몸에 닿아 있었다.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뺨을 세 대 때렸다. 정당방위라는 이름의 폭력은 셀 수 없었다. 감독은 주장을, 주장은 선배를, 선배는 후배에게 손을 댔다. 폭력은 대물림됐다.
그는 지금도 빵을 싫어한다. 끔찍했던 경험이 선명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17년 경북 문경 훈련 때였어요. 주장이 후식으로 콜라를 시켜서 한 잔씩 먹었어요. 영수증을 본 감독님이 여자 선수들을 불러내 살쪘다고 욕했어요. 빵을 20㎏ 주고 '너희가 좋아하는 빵을 토할 때까지 먹어봐'라고 했어요. 안 먹으면 때려서 토하면서 먹었어요."
훈련 중 성희롱 발언을 듣는 일도 다반사였다. "X 같은 년 엉덩이 커진 것 봐." 생전 들어보지 못한 접두사가 붙은 욕도 많았다. 정씨는 폭력을 정당화했던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했다. "선배가 행거로 엉덩이 전체가 피멍이 들 정도로 때린 뒤 멘소래담을 발라줬어요. 그러면 폭력이 나를 위한 거라고 스스로 가스라이팅했던 것 같아요."
최숙현 선수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반이 지났다. 그사이 대법원은 가해자들의 주장을 배척하고 김규봉 전 감독에게 징역 7년을, 주장 장윤정씨에게 징역 4년을 확정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최 선수의 죽음을 직장 내 괴롭힘에 의한 산업재해라고 인정했다. 스포츠 선수 중 처음이었다.
이처럼 겉으로는 바로잡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씨는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했다. 우선 업무상 질병판정서를 받았지만, 최숙현 선수의 유가족은 아직 상해사망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했다. 보험사가 금융감독원에 분쟁 조정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주변 선수들도 스포츠 폭력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에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이들은 당시 기억을 힘겹게 꺼내 증언하고, 자신이 입었던 피해를 입증하다가 2차, 3차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폭력을 증언했던 선수 대부분은 운동을 그만뒀다.
특히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모습은 용기를 내서 증언한 선수들을 더욱 아프게 한다. 가해자로 지목돼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한 코치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나로 인해 힘들었으면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가혹 행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기약 없는 민·형사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중엔 가해자가 소송을 제기했다가 보복 논란이 제기되자 취하한 경우도 있다.
정씨를 가장 절망하게 만드는 건 지금도 '제2의 김규봉 감독'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직권조사 결정문에 따르면, 스포츠윤리센터는 지난 9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서울시체육회에 서울시청 철인3종팀 지도자의 폭언, 강요, 비리 의혹 사건을 조사하고 징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충남 도민인권센터도 천안시청 철인3종팀 감독에 의한 선수 체벌 및 인격권 침해에 대해 인권구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정씨는 세상을 먼저 떠난 최숙현 선수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그때 참 잘 견뎠어. 그때 일은 잊고 다시 새 출발을 해보자. 즐겁게 살아보자." 바싹 갈라진 입술을 뜯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사실은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 같네요." 멋쩍게 웃던 그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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