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는 위선과 거짓이 없었던 사람... 지금 정치인들이 배워야"

입력
2021.11.24 15:24
수정
2021.11.24 15:4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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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최장수 오인환 장관 인터뷰
"30년 민주화 투쟁을 완결한 사람...IMF 사태로 가린 공적 재평가해야"

문민정부 최장수 각료였던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 17일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갖고 '김영삼 재평가' 책을 펴낸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문민정부 최장수 각료였던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 17일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갖고 '김영삼 재평가' 책을 펴낸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지난 22일은 김영삼(YS) 전 대통령 서거 6주기가 되던 날이다. 이날 추모사를 낭독한 김부겸 국무총리의 표현을 빌리면,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난과 우리 민주화의 역사는 늘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 호감도 조사를 해보면 YS는 늘 꼴찌 주변을 맴돌고 있다. 박정희와 노무현이 보수·진보 진영의 굳건한 지지를 받아 1, 2위를 다투는 건 그렇다 쳐도 한때 민주화 투쟁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김대중은 물론이고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보다도 호감도가 낮게 나올 때가 있다. 재임 시절 국난을 불러온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민심이 여전히 요지부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가운데 YS와 임기를 함께한 문민정부 최장수 장관이 '김영삼 재평가'라는 도전적 제목을 내건 책을 펴냈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주인공이다. 장관 발탁 전까지 28년간 현역으로 활동한 언론인 출신답게 608쪽 분량의 책은 매 장(章)마다 참고문헌을 꼼꼼히 달았고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원용해 YS의 발자취와 장단점, 그리고 공과를 차분하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정리하고 있다. 모나미 플러스펜 수백 자루를 돌려가며 원고지에 직접 써 내려갔다는 평전은 과연 YS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돌려놓을 수 있을까.

-공보처 장관으로 임명돼 문민정부의 시작과 끝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셨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책을 내셨는지 궁금합니다.

“YS가 해낸 일이 별로 없다는 묻지 마 식의 평가절하를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IMF가 오면서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했지만 IMF가 김영삼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정치적 책임이야 대통령이 지겠지만, 행정ㆍ사법적 책임까지 대통령이 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김영삼에 관한 얘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문민정부가 막을 내린 지 23년, YS가 서거한 지 6년이 됐습니다. 재조명 시기가 조금 늦은 감이 있는데요.

“우선 서거 당시엔 준비가 안 돼 있었어요. 써봤자 변명밖에 안 되는 거고, 설령 썼다고 해도 누가 보겠습니까. 시간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어요. 최대한 객관적인 자리에서 봐야 한다, 정을 떼야 된다, 그리고 냉정하게 써야 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상도동을 안 가기 시작했습니다. ‘따튀’(과실만 따먹고 튀었다는 의미)라는 얘기를 들었을 정도로요.”

-언론인인데 YS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저는 원래 한국일보 사회부 정통파 사건 기자였어요. 흔히 말하는 'YS 장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사회부장 다음에 정치부장을 거치긴 했지만 정치 쪽을 출입하지는 않았어요. 그 뒤 편집국장, 주필까지 지냈고요. 그러다 19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였던 YS를 만난 자리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정치특보로 가게 된 겁니다. ”

-옆에서 지켜본 YS의 인간적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책에도 썼는데 여백의 매력이에요. YS는 성격이 밝고 상대를 끌어들이는 강한 인력(引力)을 가지고 있어요. 또 경청하는 자세다 보니 상대가 여백을 채워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돼요. 실제로 수많은 정치인, 학자, 지식인이 그를 도왔어요.”

-정치인으로서는 어떤 리더십이었나요.

“디테일을 따지지 않고 크게 방향을 정하고 확실히 선을 긋는 스타일이에요. 한마디로 통이 큰 거예요. 거기다 순발력이 뛰어나 판단이나 결정, 행동도 빨랐어요. 담력이 있는 리더십이었죠. 난세에서 특히 빛이 나는 타입입니다.”


문민정부 최장수 각료였던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 17일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갖고 '김영삼 재평가' 책을 펴낸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문민정부 최장수 각료였던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 17일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갖고 '김영삼 재평가' 책을 펴낸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책에선 하나회 척결을 YS 재임 중 첫 성과로 꼽았습니다.

“YS는 YH여공의 신민당 당사 농성, 의원직 제명, 부마사태에 이르기까지 선두에 서서 반유신 투쟁을 이끌었어요. 5공 시절에는 단식 투쟁하고, 신당 돌풍을 일으켰고, 결국엔 3당 합당으로 대통령이 되잖아요. 그다음에 하나회 제거하고 5ㆍ18 특별법을 만들어 신군부 쿠데타를 단죄했죠. 그러니까 30년 민주화 투쟁을 시작부터 끝까지 완결하는 역할을 한 사람이죠. 우리나라가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이 지금도 많은데 군사 독재 청산이 미흡했다는 소리는 하나도 안 나와요. 제1 공로자는 YS죠.”

-책에는 YS와 DJ의 숙명적 라이벌 관계가 잘 기술돼 있습니다. 민주화 투쟁의 쌍끌이 지도자이면서 결이 달랐다고 쓰셨는데요.

“DJ는 사색적이고 분석적인 사람이에요. 4자필승론, 지역등권론 등 자기 전략을 만들어 실제 구사한 전략가다운 면모를 보였어요. DJ는 격동기보다는 평화 시에 더 빛이 나는 리더십이죠. 그런 점에서 독재 시절 격동기의 서울에서 주로 있었던 YS는 민주화에 더 많은 공을 세울 수 있는 여건 속에 있었죠.”

-1987년 대선을 앞둔 양김의 분열은 민주화 역사에서 뼈아픈 실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시 야권 단일화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고, 누구의 책임이 더 있다고 보시나요.

“명분론을 떠나 정치 현실로 보자면 당시 YS나 DJ나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동지들이 죽기살기로 단일화에 반대했어요. 지지 세력도 한쪽은 호남이고 다른 한쪽은 영남이라 타협이나 합의 가능성이 참 적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왜 안 됐냐, 누가 잘못이다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봅니다.”

-3김 시대 정치의 명과 암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두 사람이 없었으면 민주화 투쟁이 그 정도로 성공할 수 없었죠. 그 이상의 공적이 어디 있습니까. 암이 있다면 장기간 정치권을 쥐락펴락하면서도 유능한 후계 세력을 못 키웠다는 거죠."

-YS의 3당 합당에 대한 평가는 분분합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정통 선명 야당인 김영삼의 민주당이 어떻게 군사 독재의 후예들과 합칠 수 있느냐는 비판이 많습니다.

“대안으로 선택한, 변형된 정치 발전의 형태가 3당 합당이었어요. 야합이라고 욕을 먹었지만, 결과적으로 '민자당이 주도해 내각제로 선회하고 군부가 뒤에서 국정을 조정한다'는 계획을 무산시키고 직선제를 고수해냄으로써 대통령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가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어엿한 선진국으로 올라갑니다. 3당 합당은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당 합당은 호남과 진보를 포위한 지역 연합이어서 우리 정치의 수준을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습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좀 더 길게 봐야 합니다. 3당 체제가 무너지면서 DJ가 지역등권론을 앞세워 집권합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당의 대통령 후보가 다른 지역의 도움을 얻어서 권력을 창출하자는 게 지역등권론입니다. 그 뒤 호남과 좌파의 지지를 얻어서 부산 출신 노무현과 문재인이 정권을 창출했습니다. 변형되긴 했지만 일종의 지역 연대 형식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도 지역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핵을 가진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는 입장, 북한 조기 붕괴론 등 대북 강경론으로 인해 남북관계에서 남긴 업적이 별로 없다는 지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일성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급사하잖아요. 이후 2년가량 김정일은 유훈통치만 했어요. 그때는 남북이 대화할 수 있는 적기가 아니었습니다. 또 북한이 쌀을 보냈는데도 트집을 잡아서 사람을 두 번이나 억류시켰어요. YS는 파이터 성격이라 그거 다 눈 감아주면서 대화하자 이러지는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가족과 측근 비리에 대한 YS의 대응은 어땠습니까.

"YS는 자기 이름으로 집을 사본 적이 없고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본 적도 없어요. 돈이 들어오면 모두 당과 후배 의원들 정치자금으로 쓰게 했어요. 대신 부패 혐의로 적발되면 칼같이 잘랐어요. 민주산악회가 물의를 일으킨다는 얘기가 나오자 바로 해체시켰잖아요. 아들 문제도 대통령이 구속시키라고 했던 겁니다."

-차남 김현철씨의 국정 개입 의혹으로 정권 후반에 민심이 돌아섰습니다. 정확한 진상은 무엇인가요.

"한보 비리 연루설로 여론은 악화돼 있는데 검찰이 뒤져도 뭐가 안 나오는 겁니다. 고건 총리가 고심해서 내놓은 카드가 대검 중수부장을 심재륜으로 교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게 금융실명제 전격 도입 이후로 인출하지 못하고 있던 정치자금 66억 원이었습니다. 그 돈에 대한 증여세를 내지 않았다는 게 죄목이었죠. 그런 혐의로 처벌된 전례가 없다며 머뭇거리는 검찰총장에게 YS는 구속 수사를 지시했어요. 위선이나 거짓이 없었던 거죠. 지금 정치인들이 배워야 합니다."


문민정부 최장수 각료였던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 17일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갖고 '김영삼 재평가' 책을 펴낸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문민정부 최장수 각료였던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이 지난 17일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갖고 '김영삼 재평가' 책을 펴낸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집권 말기에 닥친 IMF 사태로 YS가 저평가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IMF 사태의 원인은 무엇이었으며, YS의 책임은 어디까지입니까.

"달러의 유동성 위기, 관료 간의 불통, 외교 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참사였습니다. 때문에 이건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이나 강경식 경제부총리를 형사처벌함으로써 책임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IMF 사태는 지금이라도 연구하고 조사해서 백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YS가 관료들의 잘못된 낙관론에 속아 외환위기 대응에 실기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인데요.

"잘못 알려진 겁니다. 대통령한테 다 보고가 됐습니다. 대통령을 속인 걸 전제로 해서 검찰이 강경식, 김인호를 기소했지만 무죄가 났죠. 그게 대통령이 다 알고 있었다는 의미예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는 말씀드린 대로 백서 같은 걸 만들어서 복합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YS 지지율은 집권 초 90%를 넘었지만 IMF 사태를 맞으면서 한 자릿수로 급락했습니다. 얼마 전 역대 대통령 호감도 조사에서도 1.5%에 불과했습니다. 재평가가 이뤄진다면 YS는 어떤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민주화 투쟁의 제1공로자이고 집권 시절 업적도 박정희 다음으로 많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 호감도에서 두 번째는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평가가 실제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화두를 던진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점점 더 쟁점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지금과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단계가 언젠가는 올 거라고 믿습니다.“


김영화 뉴스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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