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의 신화'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입력
2021.11.19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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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 '남성성의 각본들'

임권택 '남자는 안 팔려'(1963). KMDB 제공

임권택 '남자는 안 팔려'(1963). KMDB 제공

1963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남자는 안 팔려’는 접대부로 변장했다가 적발된 여장남자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제작된 코미디 영화다. 배우가 되기 위해 상경한 두 청년 병칠과 칠복은 연이은 구직 실패가 자신들이 남성이라서 그렇다고 여기고, 생계를 위해 여장을 선택한다. 이후 여성만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국극단에 취직한 둘은 오히려 ‘큰 키와 허스키한 목소리’ 등의 남자다움을 기반으로 여성국극단에서 인기를 얻는다. “남성으로 있을 때는 무능력하던 이들이 여자가 됨으로써 남자다움을 인정받는” 아이러니다. 이후 둘은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자신의 남성성을 각성하고 고향에 돌아가 건전한 남성 청년으로 거듭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남자는 안 팔려’를 비롯해 ‘여자가 더 좋아’(1965), ‘남자는 절개 여자는 뱃장’(1966), ‘남자식모’(1968) ‘남자와 기생’(1969), ‘내 것이 더 좋아’(1969) 등 1960년대 후반 국내에서 성행한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는 남성성의 위기를 ‘여자 되기’를 통해 극복한다. '여장'이라는 모험으로 기득권을 쥔 남성성을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풍자하는 역할을 하지만, 여전히 이성애 규범으로의 회귀라는 한계에 그치기도 한다.

왼쪽부터 ‘여자가 더 좋아’(1965), ‘남자는 절개 여자는 뱃장’(1966), ‘남자식모’(1968) 포스터. KMDB 제공

왼쪽부터 ‘여자가 더 좋아’(1965), ‘남자는 절개 여자는 뱃장’(1966), ‘남자식모’(1968) 포스터. KMDB 제공


허윤 국립부경대 국문과 교수의 ‘남성성의 각본들’은 이처럼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의 대중문화 콘텐츠를 들여다보며 한국 현대사 속 ‘남성성’을 탐구하는 책이다. 앞서 공동 집필한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원본 없는 판타지’ 등을 통해 한국 현대문학과 문화를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탐구해 온 저자의 지난 10여 년의 연구 성과를 집약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공격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대표되는 ‘남자다움’은 남성성의 본질이자 근대성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는 민족국가의 성립과 관계가 있다. 특히 근대화와 식민화가 함께 진행된 한국의 경우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군사주의적 남성성을 주요 정체성으로 채택한다. 이후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정치 체제를 겪으며 ‘국기와 애국, 용맹’을 남성적 가치로 추앙하게 된다.

심우섭 감독의 1969년 영화 '남자와 기생'의 한 장면. KMDB 제공

심우섭 감독의 1969년 영화 '남자와 기생'의 한 장면. KMDB 제공

저자는 소설에서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두드러진 남성 인물들을 통해 어떻게 '일등 시민'으로서의 남성이 만들어지게 됐는지 살펴본다. 근대 초기 이광수의 단편 소설과 해방 직후 발표된 염상섭의 ‘해방의 아들’ 속 민족국가의 주체가 될 기회를 엿보는 '조선의 아들들'을 살펴보는 한편, 김동리 소설 ‘해방’을 중심으로 국가 재건에 동원된 남성 청년들의 민족주의적이고 파시즘적 목소리가 어떻게 우익 청년단체라는 형식으로 재현됐는지 등이다.

이 외에도 육군의 선전잡지인 ‘전선문학’과 대중잡지 ‘희망’을 통해 전쟁이 강화하는 젠더규범을 살펴본다. 1950년대 손창섭과 염상섭의 소설을 통해 결혼을 거부하고 남성다움에 등을 진 청년들이 어떻게 권위적 남성성의 중심축을 뒤흔들었는지도 짚는다.

그러나 저자는 남성을 ‘일등 시민’으로 명명하려 하지만 이를 실제 현실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남성은 없다고 못 박는다. “‘일등 시민’이란 남성 자신이 죽거나 다치는 희생을 통해 획득되는 배지”이기 때문이다. 민족국가와 지배체제에 기반한 남성성이 결국 스러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남성성의 각본들'. 허윤 지음. 오월의봄 발행. 368쪽. 2만5,000원

'남성성의 각본들'. 허윤 지음. 오월의봄 발행. 368쪽. 2만5,000원


이처럼 민족국가 성립 과정에서 삭제된 여러 목소리를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저자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일은 ‘복수의 남성성’을 역사적 주체로 소환하는 것이다. 남성을 ‘전사-일등 시민-가부장(아버지)’으로 소환하는 각본이 누구를 배제하고, 어떤 지점에서 실패하는지 탐구해 한국적 주류 남성성의 허상에 주목한다.

책에 실린 글들은 2012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쓰였다. 그간 한국 사회는 성폭력 고발과 미투 운동, 트랜스젠더 군인인 고 변희수 하사의 커밍아웃과 양심적 병역 거부 첫 무죄 판결 등 다양한 젠더 의제 폭발을 경험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축에서는 ‘이대남’이라는 명명으로 남성 집단을 거칠게 분류하고 정의하려는 시도가 횡행한다. 남성은 누구여야 하고, 남성성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자의 말처럼, “지금이야말로 남성성의 변화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로 보인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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