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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 딸과 부통령 대결? 혼돈의 필리핀… "국민이 바보냐"

입력
2021.11.14 16:33
수정
2021.11.14 16:4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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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 딸 사라, 예상 깨고 부통령 출마
두테르테, '정계 은퇴' 뒤집고 부통령 출마설
인권단체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

로드리고 두테르테(왼쪽) 필리핀 대통령과 그의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 다바오 시장. 마닐라=AFP연합뉴스

로드리고 두테르테(왼쪽) 필리핀 대통령과 그의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 다바오 시장. 마닐라=AFP연합뉴스

내년 5월 치러지는 필리핀 대선의 경쟁 구도가 점입가경이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 현직 대통령은 부통령 출마 의사를 흘리고, 그의 딸은 ‘독재자 아들’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국가 권력 2인자 자리를 놓고 부녀가 다투는 초유의 풍경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변의 연속이다.

14일 로이터통신과 현지 매체 등에 따르면 로드리고 두테르테(76)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43) 다바오 시장 측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사라 시장이 내년 부통령 선거 후보로 등록했다고 전날 발표했다. 이어 지난달 대선 후보 등록을 마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64) 전 상원의원 측은 사라 시장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고 밝혔다. 필리핀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 뽑지만 한 팀으로 나서는 게 일반적이다.

사라 시장은 대선 여론조사에서 여러 차례 1위를 차지해 일찌감치 대권 주자로 꼽혔다. 특히 9일 다바오 시장 재선 도전을 포기하면서 다시 대선 출마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부통령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그는 아버지 두테르테 대통령 편에 서지도 않았다. 사라 시장과 함께 뛰는 대선주자는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이름까지 물려받은 그의 아들이다. 정치평론가들은 "놀라운 일"로 평했다.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 다바오 시장의 대선 출마를 촉구하는 지지자들의 현수막. 마닐라=로이터 연합뉴스

사라 두테르테 카르피오 다바오 시장의 대선 출마를 촉구하는 지지자들의 현수막. 마닐라=로이터 연합뉴스

더 놀라운 일은 이날 오후 보도된 두테르테 대통령의 부통령 출마설이다. 현지 매체는 당초 부통령 후보로 등록을 마친 두테르테 대통령의 측근 크리스토퍼 고 상원의원이 대선후보로 등록을 변경한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을 위해 부통령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궁 관계자는 "그게(부통령 선거 출마가) 두테르테 대통령의 계획이다. 계획이 바뀔지 우리는 모른다"고 답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연임이 불가능한 헌법을 감안해 부통령 출마 입장을 꾸준히 고수하다 지난달 2일 출마 철회를 포함한 깜짝 '정계 은퇴' 선언을 했다. 이 때문에 딸(사라 시장)을 대통령 자리에 앉혀 권력을 연장하려 한다는 분석이 대세였다. 부녀가 부통령 대결을 벌인다는 시나리오는 누구도 거론하지 않았다.

내년 필리핀 대선에 출마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 마닐라=AFP 연합뉴스

내년 필리핀 대선에 출마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상원의원. 마닐라=AFP 연합뉴스

평론가들은 예측불허 대선 구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우선 남부(두테르테)와 북부(마르코스)를 각각 대표하는 정치 가문인 '마르코스-사라 동맹'은 막강한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승리할 팀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쉽다"(정치분석가 에드먼드 타야요)고 할 정도다.

다만 대통령 부녀의 부통령 선거 대결 성사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역할 모델'로 삼고 그의 가족을 감싸 온 것으로 유명하다. 2016년 대선에서 마르코스 가문이 정치 자금을 지원해 준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하는가 하면,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지지세력이 겹치는 정치적 동지들은 물론 자신의 딸과의 대결을 어떻게 풀어갈지 관심이다.

인권단체 등은 몇몇 유력 가문에 휘둘리는 필리핀 정치판의 후진성을 꼬집었다. 인권단체 카라파탄은 "나라를 파탄 낸 20년 독재와 무고한 시민을 살상한 마약 전쟁으로 상징되는 '마르코스-사라 동맹'은 필리핀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이라고 우려했다. 정치 분석가 테마리오 리베라씨는 "정치 가문의 이합집산은 필리핀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분노했다.

내년 필리핀 대선에 출마한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 상원의원. 게티이미지

내년 필리핀 대선에 출마한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 상원의원. 게티이미지

두테르테 대통령 부녀의 폭탄 행보로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 상원의원 등 다른 대선주자들은 관심에서 배제되는 분위기다. 혼돈의 대선판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예측도 나온다. 정치 분석가들은 "더 놀라운 일들이 계속 벌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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