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박 소령이 군복 대신 직접 만든 한복 입는 까닭은

입력
2021.11.21 09:00
수정
2021.11.21 16:35
23면

박미희 도봉구 쌍문4동 주민자치회 간사
2019년 16년 군 생활 마감...한복 홍보대사 활동
'무속인'으로 오해하는 시선들 겪으며 마음 먹어
직접 만든 한복 입고 출퇴근...사무실서도 착용
한복 강좌 개설도 준비..."한옥에서 꼭 살래요"

16년 군 생활을 마감하고 현재는 서울 도봉구 쌍문4동 주민자치회 간사로 일하는 박미희씨가 쌍문4동 주민센터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이한호 기자

16년 군 생활을 마감하고 현재는 서울 도봉구 쌍문4동 주민자치회 간사로 일하는 박미희씨가 쌍문4동 주민센터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이한호 기자


"옷은 전투복 네 벌, 정복 네 벌이 다였죠. 이젠 한복 마흔 다섯 벌로 돌려 입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복쟁이로 보이는 그가 예비역 육군 소령이라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서울 도봉구 쌍문4동 주민센터 주민자치회에서 계약직 공무원으로 '간사(주민들의 요구를 모아 주민센터에 의제를 제안하는 역할)'를 맡고 있는 박미희(41)씨의 이야기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6년 동안 육군장교로 복무하다 2019년 예비역 소령이 됐다. 전역 당시 가지고 있던 옷이라곤 군복뿐이던 그는 전역 무렵 마음속에만 지니고 있었던 한복쟁이의 꿈을 행동으로 옮겼다. 한복을 직접 만들기 위해 재봉틀 다루는 법을 배웠고, 동대문 시장에서 발품을 팔며 원단을 구했다.



소령, 한복쟁이 되다

박미희씨가 직접 제작한 한복 작품집. 직접 만든 한복을 입고 전통문화가 있는 명소 등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 두 권의 앨범으로 엮었다. 전세은 인턴기자

박미희씨가 직접 제작한 한복 작품집. 직접 만든 한복을 입고 전통문화가 있는 명소 등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 두 권의 앨범으로 엮었다. 전세은 인턴기자

지금의 그는 군인 시절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박씨는 매일 한복을 입고 출근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물론 쌍문동 주민들까지 그를 '쌍문동 한복쟁이'라 부른단다. 그에게 한복은 어떤 의미일까.

"특별하게 느껴져 좋아요. 사람들이 '한복 입는 박미희'라는 정체성으로 기억해주니 좋죠."

박씨는 부대 안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 뒤 13년 동안 주말 부부로 지냈다. 군인 부부였던 터라 각자 부대를 옮겨다니기 바빴고, 아들과 둘이서 지내는 동안 친정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전학만 여섯 번을 다니게 된 것이 못내 마음이 아팠다. 결국 남편이 직장을 서울로 옮기고 자신은 새 직업을 모색하면서 3년 전 세 식구가 박씨의 고향인 쌍문동에 둥지를 틀었다.

군복을 벗은 뒤 허전함은 한복이 채워줬다. 고등학교 때부터 '한복과 함께하는 삶'을 바랐다는 박씨는 전역이 빨라지면서 한복쟁이의 꿈 실현도 앞당기게 됐다고 했다.

"'소령 박미희'에서 '한복쟁이 박미희'로, 한복은 인생 2막을 여는 전환점이에요."

군대 내 동료들이나 친구들은 각 잡힌 보병장교었던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며 웃어보였다. "군 동료들은 '위장했냐'고 놀리기도 해요. 친구들을 만날 때도 한복을 입곤 하는데, '하여간 특이해' 하는 반응이죠."



"아버지 수의 잊지 못해" 부모님 영향으로 키운 한복 사랑

박미희씨가 한복 공모전에 출품한 한복 사진들. 가장 왼쪽 사진은 처음 만든 한복으로, 아버지 임종 당시 수의색인 겨자색으로 골랐다고 한다. 아버지의 배옷 수의는 박씨에게 한복쟁이가 되는 전환점이 됐다. 전세은 인턴기자

박미희씨가 한복 공모전에 출품한 한복 사진들. 가장 왼쪽 사진은 처음 만든 한복으로, 아버지 임종 당시 수의색인 겨자색으로 골랐다고 한다. 아버지의 배옷 수의는 박씨에게 한복쟁이가 되는 전환점이 됐다. 전세은 인턴기자

박씨에게 한복쟁이의 꿈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한복을 좋아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박씨를 비롯한 네 명의 딸에게 특별한 날 입는 한복을 한 벌씩 마련해줬다.

"서랍장 맨 위 칸은 어머니 한복, 그 아래는 저희 네 자매들 한복이 들어 있었죠."

어머니가 외출하면 언니들과 자기 한복을 꺼내 '패션쇼 놀이'를 하며 놀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몸이 커질 때마다 어머니가 새 한복을 사주거나 언니들로부터 물려받았던 추억이 쌓일 때마다 박씨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한복의 소중함이 새겨졌다.

박씨는 조심스레 '아버지 수의'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겨자색 철릭 수의를 입으셨어요. 그 모습이 한복을 입은 풍채 좋은 장군처럼 느껴져서 임종이 슬프게만 느껴지지 않았죠." 그때 살아계실 때 한복을 입으셨다면 잘 어울리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복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갖게 됐다고. 그래서 그의 한복 첫 작품도 아버지 수의 빛깔인 겨자색이었다.

군인이었던 그에게 아버지는 남다른 의미였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박씨가 직업군인을 선택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 그러나 대학 졸업 뒤 여군사관 50기에 지원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전투복을 입게 됐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학부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임용고시를 도전할 계획이었던 그가 군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박씨는 고등학생 때, 그리고 임관 뒤 소위 시절 썼던 기록장에 "50세 이후부터는 한복을 입어야겠다"고 썼던 기억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피어난 한복 사랑은 어느새 현실이 됐다.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가 된 지금, 그는 아들에게 명절마다 새 한복을 만들어주거나 사준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 언니들과 함께 입었던 한복에 대한 추억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7월부터 한복 홍보대사 활동..."일상서 한복입는 날 오는 게 꿈"

10월 11일 코엑스에서 열린 한복문화주간 행사에 직장인 한복 홍보대사 활동을 위해 참석한 박미희씨. 그는 평소처럼 한복을 입고 코엑스를 찾았다. 인스타그램 캡처

10월 11일 코엑스에서 열린 한복문화주간 행사에 직장인 한복 홍보대사 활동을 위해 참석한 박미희씨. 그는 평소처럼 한복을 입고 코엑스를 찾았다. 인스타그램 캡처

한복 사랑이 특별했던 박씨에게도 부담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매일 한복을 입고 출근하는데,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의 시선에 무안함을 느끼곤 했다고 털어놨다.

"아무래도 한복이 오방색이다보니 일반 옷보다는 화려한 경우가 많잖아요. 어르신들은 뚫어져라 보시더라고요. 무속인인가, 하고요."

그때부터였다. 마음속에 '한복이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때마침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인 한복진흥센터에서 한복 홍보대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홍보대사가 되면 한복을 입고 직장에 출퇴근하면서 한복의 일상화에 이바지한다는 활동 목적이 박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올해 7월 한복 홍보대사 활동을 시작한 박씨는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한복을 입고 출근한 모습을 브이로그로 만든다. 일명 '매마수(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문화가 있는 날'을 '한복 입기 좋은 날'로 정했다. 이 밖에 한복 직접 만들기, 한복 쇼핑, 한복 문화 주간 행사 등을 주제로 만든 콘텐츠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등에 올린다.




박미희씨의 한복 원단 노트. 한복을 만들 때마다 사진과 원단 영수증을 붙인다. 이렇게 직접 만든 한복이 어느덧 마흔 다섯 벌이다. 전세은 인턴기자

박미희씨의 한복 원단 노트. 한복을 만들 때마다 사진과 원단 영수증을 붙인다. 이렇게 직접 만든 한복이 어느덧 마흔 다섯 벌이다. 전세은 인턴기자

박씨는 직접 만든 한복 사진을 모아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동대문에서 직접 발품을 팔며 천을 골랐던 경험을 살려 한복 천이 아니라 일반 천을 써서 흡수력은 물론 편안함을 갖춘 옷을 보여줬다. 일상 속에서 과하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일반 천을 적극 활용해 입던 노하우가 담긴 것. 이렇게 제작한 한복만 해도 45벌이다.

"한복 한 벌에 4~8마가 필요한데 한 마당 4,000~8,000원이면 새 한복부터 고급한복까지 다양하게 만들 수 있어요. 여름 일상복은 3만 원 이하로 제작이 가능해요. 사입으려면 10만 원을 훌쩍 넘어가지만, 만들어 입으면 훨씬 저렴하죠."

박씨는 2016년 재봉틀을 처음 배워 한복을 직접 만들어 입기 시작한 지 4년밖에 안 됐지만, 실력은 수준급이라고 자신했다. 펼치면 직사각형이 되는 허리치마 모양으로 주욱 잘라 허리끈을 동여매서 입거나, 윗 저고리를 조끼 형식으로 만들어 반팔과 긴팔을 붙였다 떼는 방식으로 사계절 내내 입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한복이 잘 어울린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그는 한복 홍보대사 활동이 정말 즐겁다며 웃어보였다.

"나름의 방식으로 편안하게 입는 법을 터득했어요. 관공서에서도 '신한복(생활한복을 뜻하는 한복진흥센터 권장 용어)'을 유니폼으로 도입한다고 하는데, 일상에서 한복 입는 문화가 하루빨리 자리 잡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처음 특이하게 보던 동료들...이젠 '한복강좌' 함께 만들어


서울 도봉구 쌍문 4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자체 예산 감사에 박미희씨가 한복을 입고 참여하고 있다. 박씨는 평소에도 직접 만든 한복을 입고 업무를 본다. 이한호 기자

서울 도봉구 쌍문 4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자체 예산 감사에 박미희씨가 한복을 입고 참여하고 있다. 박씨는 평소에도 직접 만든 한복을 입고 업무를 본다. 이한호 기자

간사로 일하는 속에서도 '어떻게 한복을 일상 속에서 입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줄곧 따라다녔다. 박씨는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의제를 발굴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민관 연결 다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함께 일하는 주민센터 주민자치회 동료들은 처음에 그를 특이하게 보기도 했다. 온종일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주민자치회 회장 김남희(61)씨는 "처음에는 한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다"며 박씨에 대한 첫인상을 설명했다. 그러나 한결같이 입고 출근하는 모습에 한복을 대하는 진심을 느껴, 지금은 생각이 바뀌게 됐다고 전했다.

결국 김씨는 6월 주민 100명과 구청장, 시의회의원들이 모이는 주민총회에서 박씨와 함께 신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미희씨가 잘 만들어 입으니, 배우고 싶더라고요. 다음 번 성과 공유회 때도 한복을 입고 갈 생각이에요."

쌍문4동 주민들 역시 박씨의 영향을 받고 점점 한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직접 주민들을 만나는 주민총회에서도 항상 한복을 입고 일하다보니, 자연스레 주민들이 먼저 '한복 만드는 강좌는 안 여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이에 박씨가 주축이 돼 동료들과 '한복 만들기 교실'을 만들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잠잠해지는 대로 본격적으로 강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박씨의 한복사랑의 끝은 무엇일까.

"지금처럼 한복과 전통문화를 가까이 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5년 안에 한옥을 지어서 한복을 잘 차려입고 다도회를 여는 게 꿈이라면 꿈일까요."


전세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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