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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은 소녀이고 살아남아 성장하는 건 소년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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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무해하고 약해 보이는 소년이 해외 드라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얻었던 시기가 있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와 '빌어먹을 세상 따위' 등의 작품이 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되었던 3~4년 전쯤이다.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거나 표현할 방법을 모르는 마른 체구의 병약해 보이는 백인 소년이 학교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성인의 시선으로는 당돌하다고 표현할 법한 소녀가 나타난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은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상처를 발견한 뒤, 같이 세상에 반항하거나, 모험을 떠나거나, 사건을 만들면서 가까워진다. 여기서 핵심은 소년이 무해해 보인다는 것, 곧 소녀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괴롭게 만들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폭력과 위협, 감정적 소모와 정서적 학대 등을 동반한 이성애 관계의 위험성이 구체적으로 대두되고, 해로운 남성성이 여성들뿐만 아니라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 직후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며, 대부분의 주인공이 10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좀 더 흥미로워진다. 무해한 소년들은 과연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는 남성으로 자라날 수 있을까.
2019년 10월 미국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훌루를 통해 공개됐고 한국에서는 웨이브를 통해 볼 수 있는 '루킹 포 알래스카' 역시 같은 맥락 안에 있는 작품이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등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청소년 소설을 쓴 존 그린의 동명 데뷔작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녀 알래스카 영(크리스틴 프로세스)이 프레임 바깥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포스터와 제목만 보면 이 작품이 알래스카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착각이 들지만, '루킹 포 알래스카'는 어딘가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알래스카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 마일스 홀터(찰리 플러머)의 이야기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마일스는, 유명인이 죽음을 맞던 상황과 유언을 외운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특징도 인상도 없는 소년이다. 이런 마일스가 미국 앨라배마주 외딴 시골 기숙학교로 떠나는 어울리지 않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직 죽은 사람이 남긴 말들만 벗 삼아 지내던 마일스는 기숙학교에서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 만한 또래를 만난다.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처지지만 어른들 몰래 온갖 장난을 감행하며 학교를 흥미롭고 기대되는 공간으로 만드는 룸메이트 칩(데니 러브)과 학교의 모든 정보와 소문을 알고 있는 타쿠미(제이 리), 그리고 책과 장난을 좋아하는 똑똑하고 매력적인 페미니스트 알래스카가 그들이다. 이 학교에는 선생님들에게 걸리지 않는 수준의 장난으로 싸우고 세를 과시하는 유구한 전통이 있는데, 부유한 백인 남학생 중심의 평일전사단과 장난으로 전쟁 중이던 세 친구에게 마일스까지 휘말리면서 마일스의 모험과 친구들의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로워진다.
'루킹 포 알래스카'는 배경이 되는 학교생활과 문화, 그 세계만의 질서와 규칙이 10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이 작품이 구축해 둔 10대들의 세계로 시청자들을 초대한다. 마일스와 친구들은 장학금을 받고 성실히 수업을 듣는 모범생 쪽에 속하지만, 걸리지 않는 수준 안에서는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면서 나름의 비행도 일삼는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 모두와 어울리며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칙 하나는 철저하게 지킨다. 그건 바로 고자질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장난을 치고 싸우는 상황이라고 해도, 학생들은 서로의 편이다. 밀고는 우정을 파는 일이기 때문에 밀고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추방될 수 있다는 의미다.
'루킹 포 알래스카'는 이야기의 절반을 1회 초반에 퇴학당한 학생들을 밀고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는 이야기로 끌고 간다. 나머지 절반은 밀고자가 밝혀진 후, 친구들이 어떻게 우정을 회복하고 서로를 이해하는지에 관심을 쏟는다. 이 과정에서 마일스는 알래스카에게 친구로서도 이성으로서도 좋아하는 마음을 품게 되고, 시선과 타이밍이 계속 어긋나는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이 작품을 계속 보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특히 매 에피소드 맨 앞에 교통사고로 누군가 사망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미스터리 요소를 넣어 결말을 향한 궁금증도 계속 이어간다.
10대의 우정과 관계, 특히 미국 학교라는 공간 속 계급과 인종 문제를 그리는 방식 면에서 '루킹 포 알래스카'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10대 학원물이자 가벼운 미스터리로서의 장르적 균형감도 잘 유지한다. 스타는 없지만 젊은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기숙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과 2005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잘 활용하면서 종교와 문학 수업을 통해 지속해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를 주제와 잘 엮어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마일스를 비롯한 학생들은 인생, 죽음, 삶의 근원적인 고통, 신의 존재 등과 연결된 질문을 끊임없이 받고, 이를 고민한다. 밀고자가 되면 존재가 사라지는 끔찍한 경험을 해야 하고 감정과 관계의 복잡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만의 작은 세계에서, 학생들은 불어 문법부터 죽음까지 모두 배운다. 답이 없는 세계에서 질문하는 법을 배운다.
따돌림을 당하게 된 알래스카는 "이 고통의 미로에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들고 종교 수업을 담당한 선생님을 찾는다. 답이 없기 때문에 좋지 않은 질문인 것 같다며 알래스카가 염려하자, 선생님은 이렇게 격려한다. "최고의 질문은 원래 그런 거란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삶의 재앙이나 상실에 이유는 없다는 것, 그럼에도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질문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인간은 성장한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던진 알래스카는 성장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 '루킹 포 알래스카'의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작품의 교훈에 따라서 글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려고 한다. 무해한 소년들이 소녀를 잃고서야 인생이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이야기가, 소녀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루킹 포 알래스카'는 알래스카라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알래스카를 찾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알래스카를 잃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던 마일스와 칩은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곧장 뚫고 나아가는 법밖에 없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실천하며 상실에 직면한다. 하지만 유일한 여성이었던 알래스카에게는 왜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일까?
소년의 성장담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며 여전히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뀌어 가는 세상에서 읽고 보는 감상자들이 여성을 해치지 않는 무해한 남성상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여러 작품이 이 기대에 부응하는 인물들을 창조하고 발견해낸다고 해서 그걸 과연 진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기 있는 남자 주인공의 성격과 체격, 외모가 바뀌었을 뿐, 죽거나 사라지는 것은 소녀이고 살아남아 성장하는 것은 소년이다. 이름마저 알래스카인 소녀는 소년이 모험해야 할 미지의 세계이자, 개인의 믿음이나 이성, 가치관까지도 유행하는 스타일로 무장한 만들어진 캐릭터로서만 마일스의 눈을 통해 '보여진다'. 최고의 질문을 던지는 유일한 학생이었던 알래스카가 자신이 아닌 마일스가 작가가 된 미래만을 상상하는 건, 이 이야기 속에서 알래스카가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알래스카가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이 겪은 일을 온 힘을 다해 감당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 말할 수 있었다면 '루킹 포 알래스카'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어땠을까? 이 또한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지만, 책과 이야기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고통의 미로를 빠져나가고 싶어 했던 알래스카라면 이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자신만의 모험을 떠났을 것이다. 유해하든 무해하든, 어떤 소년과도 상관없이 성장하는 소녀의 모험담이라면, 당장이라도 보고 싶다. 지금 필요한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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