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의원 피살 뒤 커지는 고민…"유권자 대면 만남 계속해야 하나"

입력
2021.10.18 17:15
수정
2021.10.18 18:4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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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하원의원 "온라인으로 주민 만나야"
정부는 현장 경비 확충 등 물리적 위협 차단
"의원 안전-민주주의 본질 사이 균형 중요"

17일 영국 남동부 레이온시 세인트마이클스 교회에서 유권자들과의 대화 도중 피살된 데이비드 에이메스 하원의원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레이온시=AP 연합뉴스

17일 영국 남동부 레이온시 세인트마이클스 교회에서 유권자들과의 대화 도중 피살된 데이비드 에이메스 하원의원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레이온시=AP 연합뉴스

‘정치인의 안전’ 확보 방안을 두고 영국 사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공공장소 한복판에서 대낮에 지역구 주민들과 만나던 현직 국회의원이 피살되는 사건이 던진 충격파다. 대의민주주의 상징이자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에게 닥친 잠재적 위협을 차단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무분별한 공격을 막기 위한 현장 안전 조치 강화에만 나설지, 아니면 아예 대면 만남을 중단하고 소통 창구를 옮겨야 할지 등 향후 대책의 방향성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리는 모습이다.

17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등 외신에 따르면, 현지 의원들이 유권자들과의 현장 만남을 지속해야 하는지를 두고 영국 사회가 시끄럽다. 15일 낮 12시쯤 보수당 데이비드 에이메스(69) 하원의원이 지역구인 런던 동부 에식스의 한 감리교회에서 주민들과 면담하던 도중 갑자기 튀어나온 소말리아계 영국인이 휘두른 흉기에 수차례 찔려 숨진 게 논쟁의 발단이다.

당장 동료의 끔찍한 죽음을 목도한 의원들은 몸을 한껏 사리고 있다. 일부는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정례적으로 이뤄지던 유권자들과의 타운홀 미팅(공개 자유 토론) 등 만남 행사를 일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간과 장소를 불특정 다수에게 사전 공개하는 행사 특성상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건 ‘온라인’이다. 국방위원장인 토비아스 엘우드 하원의원은 당분간 주민들과의 대면 접촉 중단을 주장하며,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을 통한 만남을 제안했다. 보수당 게리 스트리터 하원의원도 “우리 모두는 유권자들을 만나는 민주적 이상에 전념하고 있지만, 의원들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는 만큼 미팅 방식을 (온라인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

이는 정치인을 향한 ‘묻지 마 공격’이 도를 넘었다는 판단에서 나온 고육책이다. 이미 영국에선 2010년과 2016년 의원 두 명이 지역 주민 행사에서 살해된 뼈아픈 기억이 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행사 진행 방식의 변화는 정치 환경이 점점 더 양극화하는 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 위협이 커지는 상황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17일 영국 런던에서 경찰이 데이비드 에이메스 의원 살해 용의자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집을 수색하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17일 영국 런던에서 경찰이 데이비드 에이메스 의원 살해 용의자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집을 수색하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영국 정부도 보안 강화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러나 의원과 지역구 주민의 만남을 정부 차원에서 제한하는 방식에는 선을 그었다. 프리티 파텔 내무장관은 “우리는 국민에게 접근할 수 있는 올바르고 열린 사회에 살고 있다”며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선출된 대표자들이 대중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무부는 일단 사건 직후 모든 하원의원에 대한 경비 체제를 재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앞으로 의원들이 유권자를 만날 땐 현장에 경찰을 파견한다는 방침이다. 공항에서 쓰이는 스캐너(검색 장비) 사용도 검토 중이다. 선출직 공직자로서 민주적 역할과 책무를 다하되, 만에 하나 발생할지 모르는 물리적 위협은 제거하기 위한 복안인 셈이다.

린지 호일 하원의장 역시 BBC에 “우리는 이 상황에서도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확실히 해야 한다”며 정부 방침에 힘을 보탰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의원들 안전을 지키면서도 영국 민주주의의 고유한 본질을 보호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닉 토머스-시먼즈 노동당 예비내각 내무장관)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정부 조치가 미흡하다는 견해는 여전하다. 현장 보안 인력을 대거 늘리는 방침이 되레 유권자와 의원 간 심리적 벽만 높일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데이비드 데이비스 전 브렉시트부 장관은 “의원들과의 면담 자리에 가는 사람은 주로 고용주나 정부의 복지제도 등에 실망한 취약계층”이라며 “이들은 문 앞에 선 건장한 경찰관에 의해 입장이 제지될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허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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