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화약고' 레바논, 시위 중 총격전 6명 사망... "내전 악몽 다시 떠올라"

입력
2021.10.15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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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무장정파 헤즈볼라 시위 도중 발생
"2008년 이후 베이루트서 최악의 폭력 사태"
배후 지목된 기독교 정당 "개입 안 해" 부인
고질적 경제난에 정정불안 겹치며 불안정↑

15일 레바논 베이루트 총격전 현장에서 장갑차에 탄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베이루트=AP 연합뉴스

15일 레바논 베이루트 총격전 현장에서 장갑차에 탄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베이루트=AP 연합뉴스

‘중동의 화약고’ 레바논 수도 한복판에서 시위 도중 총격전이 벌어져 최소 6명이 숨졌다. 아직 추가 피해나 사태 경위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종교 대립에서 비롯된 유혈 충돌이라는 해석이 많다. 2008년 이후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최악의 폭력 사태로도 꼽힌다. 고질적인 종파 갈등, 극심한 경제난에 온 나라가 쑥대밭이 돼 있는 터라, 시민들은 최소 1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30여년 전 내전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며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14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수도 베이루트에서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신원 미상의 조직 간 총격전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최소 6명이고, 30명이 부상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누가 먼저 총격을 시작했는지, 헤즈볼라의 상대는 누구였는지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최초 총성 이후 4시간가량 이어진 교전에는 권총과 자동소총, 로켓 추진식 유탄발사기 등이 동원돼 ‘시가전’을 방불케했다는 게 외신들의 설명이다.

한낮 도심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총격전에 거리는 피로 얼룩졌다. 인근 학교와 건물 유리창에도 총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집안에 있던 다섯 아이의 엄마가 총을 맞고 숨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영국 BBC방송은 “주민들은 집에서 도망치고, 학생들은 책상 아래에 몸을 숨겨야 했다”고 현장 상황을 전했다.

사건은 베이루트 남쪽 타유네에서 헤즈볼라와 시아파 정치ㆍ군사 조직 아말이 주도한 시위 중 일어났다. 지난해 8월 베이루트항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발 참사 진상조사 책임자인 타렉 비타르 판사가 최근 시아파 의원 등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데 반발, “정치화한 판사를 교체하라”고 요구하는 시위였다. 헤즈볼라는 “시위대 행진 도중 갑자기 인근 건물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 왔다”고 밝히며 기독교 계열 정당 ‘크리스천 레바논 포스(CLF)’를 배후로 지목했다. CLF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현장 봉쇄 및 인근 지역 수색에 나선 레바논군은 시리아인 한 명을 포함한 용의자 9명을 검거했다.

15일 헤즈볼라와 신원 미상 조직 간 총격전이 발생한 레바논 베이루트의 한 거리에 유리 파편들이 가득히 널려 있다. 베이루트=AP 연합뉴스

15일 헤즈볼라와 신원 미상 조직 간 총격전이 발생한 레바논 베이루트의 한 거리에 유리 파편들이 가득히 널려 있다. 베이루트=AP 연합뉴스

추가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15년간(1975~1990년) 이어진 내전을 비롯, 크고작은 분쟁들을 여럿 겪었던 레바논 국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이슬람과 기독교 간 갈등에서 촉발된 내전 당시 사망자는 최소 15만 명, 최대 23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슬람 양대 종파인 시아파와 수니파 신도가 각각 28%, 기독교 신도는 31%에 달하는 레바논은 종교 갈등에 따른 무력 충돌이 최대 위협으로 꼽힌다. 이번 사건도 종파 간 갈등으로 추정되고 있어 ‘제2의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사드 알하리리 전 총리는 트위터를 통해 “수많은 희생자를 낸 내전을 떠올리게 했다”며 슬픔을 표했다.

이번 사건이 안팎으로 불안한 국가 위기에 기름을 끼얹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2019년 이후 지속되는 정정불안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 등에 국가 경제는 그야말로 최악 상황이다. 400%에 달하는 물가 상승, 90% 이상 폭락한 통화 가치 등 여파로 국민 75%는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세계은행(WB)이 지난달 “19세기 중반 이후 레바논 경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심각한 불황”이라고 진단했을 정도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이번 충돌은 이미 파괴적인 정치와 경제 위기로 휩싸인 레바논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폭력사태 중단을 촉구했다. 나지브 미카티 레바논 총리도 긴급성명을 내고 15일을 ‘희생자 추모의 날’로 지정했다. 다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바셀 살루크 도하대학원 연구소 정치분석가는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에 “각 종파 정당들은 긴장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거의 관심이 없다”며 “오히려 지지층을 동원할 수 있는 ‘윈-윈’ 국면으로 이번 충돌을 여기고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허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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