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 루시, 래아... 가상인간은 왜 다들 날씬하고 어린 여성일까

입력
2021.10.14 04:30
1020 여성으로 설정된 가상인간
'마케팅 효과' 명분 뒤 외모 강조
설계 의도·목적 속 편향성 경계해야

지난 7월 말 '로지'가 스카프로 옷을 만들어 입은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사진. 이후 8월 이 사진을 붙여 로지 패션을 다룬 기사가 보도되자 외모를 평가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인스타그램 캡처


"비키니인가?" OO가 걸친 '한줌' 브라탑

"눈 사이가 왜 이렇게 멀어"
"여자냐? 가슴이 간장 종지네"
"솔직히 이쁘진 않다"
"배꼽이 너무 크다"
"지하철 타면 쉽게 보일만 한 얼굴"
"네 자로 정리하자. 못 생 겼 다"

지난 8월 포털에 노출된 기사와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이다. 1년 전 사라진 연예뉴스 댓글창이 부활한 게 아니다. OO에 들어간 이름은 '로지'. 그녀는 고도의 인공지능(AI)과 그래픽 기술로 빚어낸 가상인간(버추얼 인플루언서·virtual influencer)이다.

로지와 동료라 할 수 있는 가상인간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중국, 태국 곳곳에 존재한다. 인플루언서답게 수십만, 수백만의 팔로어를 거느리고 광고계 러브콜까지 받는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젊고, 날씬하고, 매력적인 여성이란 점이다. 로지도 댓글을 읽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이 소비되는 방식도 여성 연예인과 비슷하다.

가상인간 젠더설정, '여성'

로지가 최근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 인스타그램 캡처

1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유명한 가상인간들은 하나같이 성별은 '여성', 나이는 '10~20대'로 설정돼 있다. '1호 가상인간'이라 불리는 미국의 '릴 미켈라'(19세·AI 스타트업 브러드 개발)가 탄생한 이래, 우리나라에서도 로지(22세·사이더스 스튜디오X)와 '루시'(29세·롯데홈쇼핑), '김래아'(23세·LG전자), '한유아'(19세·스마일게이트)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공유하는 일상은 흔히 MZ세대가 '힙하다'는 장면들로, 음악과 춤을 사랑하고 꾸미는 걸 즐기는 모습이다. 이들이 입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게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다. 릴 미켈라의 팔로어는 308만 명,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로지와 루시도 각각 10만 명, 4만 명이 넘는다.

릴 미켈라(왼쪽)와 루시. 인스타그램 캡처

산업계의 논리는 이들이 늘씬한 젊은 여성으로 설정되길 원한다. 화장품, 패션 등 주 소비자층이 여성이어서 상품 홍보에 활용하기 쉽고, '닮고 싶은' 자극을 만들고, 호감도와 친밀감을 형성하기 쉽다는 이유다. 실제 사람과 달리 말실수나 사생활, 과거 품행 등 각종 구설에 휘말릴 걱정이 없는 건 덤이다. 탈 없이 오래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전략인 셈이다.

신한라이프의 광고에 출연해 춤을 추는 로지의 모습. 신한라이프 유튜브 캡처


인간 대체인가, 편향 수단인가

가상인간을 다룬 기사 제목들. 구글 캡처

하지만 일각에선 굳이 가상인간이란 신기술을 통해 인간사회의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거나 부각하고, 오히려 더 쉽게 성적 대상화가 되는 현상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간스러움'을 지향한다면서 특정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강조하는 게 자연스럽냐는 문제의식이다.

실제 여성 가상인간을 설명하는 단골 수식어는 몸매나 미모에 대한 외모평가형 글들이다. 중국에서는 자국의 가상인간 '앤지'를 두고 외모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앤지의 '두꺼운 허벅지, 거친 피부, 쌍꺼풀이 없는 눈'이 못마땅하고, 지금 중국 여자 연예인들은 앤지보다 훨씬 더 날씬하고 피부가 맑다는 비판이 쏟아진 것이다. 사람에 대한 외모품평 잣대가 가상인간에게 그대로 옮겨간 모양새다.

중국 가상인간 '앤지'. 웨이보 캡처

아무리 가상인간일 뿐이라 해도, 결국 그 가상인간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결정하는 건 소수의 사람들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만들어낸 가상인간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소비자들의 편향성이 더 굳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AI와 자동화된 불평등' 등의 논문을 쓴 이희은 조선대 교수는 "인간 사회의 성적 이미지나 가치가 기술에 그대로 구현되고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문제"라며 "AI 같은 신기술은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그렇게 오해하게 만드는 일종의 '블랙박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그 블랙박스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하고, 개발 초기부터 성, 지역, 계층 등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맹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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