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랑이 가능할까

입력
2021.10.12 04:30
수정
2021.10.12 13:3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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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멜라 '설탕, 더블더블'(현대문학 9월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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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고 난 뒤 이전 연인과 관련된 것들은 깡그리 기억 저편으로 밀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로 추억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소중히 보물 상자에 보관했다가 종종 꺼내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보물상자를 버리지 못하는 쪽이다. 이 기억과 물건마저 없으면 우리가 한때 그렇게나 열렬히 사랑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실감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최근엔 보물상자를 만들 필요도 없다. SNS가 있으니까. 상대방이 나를 ‘차단’만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지금은 누구와 함께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당장이라도 알 수 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온라인 공간에 ‘전시’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때로 우리는 과거와 영영 결별하지 못한다.

그런데 언제든 과거와 연결될 수 있는 사랑이 그저 축복이기만 할까? 현대문학 9월호에 실린 김멜라의 ‘설탕, 더블더블’은 사랑의 흔적을 더듬으며, 과거를 바꿔 보려는 사람들의 안간힘을 보여준다.

‘나’는 환경의날 지정 50주년을 맞이해 서울역에서 열리는 미디어아트 전시회에 스태프로 자원한다. 나의 진짜 목적은 전시 참여 작가인 윤도윤, 더 정확히는 그의 아내이자 나의 첫사랑인 희래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윤도윤은 자신의 행복을 인터넷에 ‘전시’하는 남자다. 직접 디자인한 침실 조명, 가족을 위해 준비한 브런치, 해변에서 주운 쓰레기 사진까지 모두 SNS에 올렸다. 나는 윤도윤의 SNS를 통해 첫사랑인 희래의 결혼생활을 짐작한다.

처음에는 희래가 잘 살고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점차 그들의 행복에 상처를 받는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 그래서 희래에게 주지 못한 것을 함께 누리는 윤도윤과 희래를 보며 윤도윤을 부러워한다. 그래서 그의 SNS를 통해 알게 된 윤도윤의 취향을 모방한다. 윤도윤이 감명 깊게 봤다는 영화를 찾아 보고, 윤도윤이 아내와 다녀왔다는 곳에 똑같이 가서 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금 희래의 옆자리에 윤도윤이 아닌 자신이 있는 현재를 상상하고자 한다.

김멜라 작가. 현대문학 제공

김멜라 작가. 현대문학 제공


'나'가 SNS를 통해 자신의 실패한 과거-사랑-를 바꿔 보려는 인물이라면, 내가 전시장에서 만나게 되는 할머니라는 인물은 현재에 구멍을 냄으로써 과거-사랑-를 확인하려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역에서 식모로 근무했던 할머니는 당시 일본인 역장과 사랑에 빠진다. 역장은 서울역 어딘가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두었고 그곳에 당시 기준으로 금만큼 귀했던 설탕을 묻어 두었다며 할머니에게 청혼했다. 설탕 한 묶음을 들고 어디 먼 데 가서 함께 살자며.

광복이 오고 역장은 종적을 감췄지만, 할머니는 그가 서울역 어딘가에 숨겨 두었다는 설탕을 찾기 위해 벽에 구멍을 뚫으려 한다. 만일 벽을 뚫어 보았는데 설탕이 없으면 어떻게 하냐는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상관없다”고 답한다. “이미 그 설탕으로 충분하게 달콤했으니까.”

어쩌면 이들에게는 과거에 그런 사랑이 존재했다는 ‘진실’보다 사랑이 존재했다는 자신의 ‘믿음’이 더 중요한지 모른다. 그 믿음으로 사랑이 내 곁에 없는 현재까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가 현재를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현재가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세상에 나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랑”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과거는 과거에 묻어 둬야만 하는지 모른다. "설탕은 벽 뒤에 있을 때만 달콤"할 테니까.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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