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신고에 "전근 갈래, 그만 둘래?" 이런 회사, 처벌은

입력
2021.09.29 04:30

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입사 한 달 정도 됐을 때였습니다. 그 사람이 면담하자며 자기 방 소파로 데려가 앉히더니 문을 잠갔어요. "나랑 하면 편하게 다닐 수 있다" "나한테 잘 보이면 앞으로 계속 일하게 해줄게"라면서 계속 성관계를 요구했습니다. 뿌리치고 문고리를 잡으려는 절 막아서곤 "이대로 나가면 어떻게 될지 잘 생각해 봐"라고 했어요.

일용직만 전전하던 저에게 이 직장은 간절했습니다. 비록 계약직이어도 4대 보험이 되는 곳은 처음 다녀봐요. 큰 문제 없으면 1년씩 계약이 연장된다고도 했고요. 정착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 사람은 제 계약 연장 여부를 결정하는 인사권자예요. 그런 사람이 다시 생각해보라니까 순간 '지금 나가면 해고인가?'라는 생각에 그대로 얼어붙었어요.

그 날의 성폭행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무실이 허전해지는 교대시간만 노려 또 일자리로 겁박하고 성폭력을 저질렀죠. 처음부터 대처를 잘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얼마 뒤 비슷한 상황이 되자 대처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강하게 밀어내고 실랑이를 벌였더니 그 사람이 "일단 나가 봐"라고 했어요.

성폭력에서 노골적 괴롭힘으로

게티이미지뱅크

그때부터 지독한 괴롭힘이 시작됐습니다. 원래 다른 근무자가 한 달에 한 번꼴로 하는 일을 갑자기 저한테 매일 시켰어요. 코로나19 음성 판정이 나오면 본사 지침은 출근인데, 저한테만 다짜고짜 2주 동안 무급으로 나오지 말래요. 바뀐 업무 일정표를 저한테만 안 알려주곤 마음대로 출퇴근한다며 윽박질렀습니다.

그래도 버텼어요. 제가 폭발한 건 가족을 건드린 협박 때문입니다. 또 성관계를 요구하는 그 사람한테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더니 "네 아들이 다니는 직장 홈페이지에 나랑 성관계했다고 올릴 거야"라고 했어요. 주변 사람들한텐 뭐라고 했는지, 동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어요. "왜 관리자를 힘들게 하냐" "네가 혼자 사니까 꼬리 친 거 아니냐"는 말도 들어야 했습니다.

믿었던 회사의 배신

나만 숨기고 참는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면접 때 봤던 회사 이사에게 성추행 정도로만 알렸지만 누구 편도 들어줄 수 없다고 답하더군요. 제가 편들어 달라고 했나요? 창피함을 무릅쓰고 성폭행 사실까지 털어놨는데도 그 상사를 감싸고 돌았어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내용증명을 그 상사 이름과 회사 앞으로 보냈더니 그제야 반응이 오더군요. "이사 심부름으로 왔다"던 회사 고충처리담당자란 사람은 "그 사람을 해고하면 당신도 다니기 어려울 거다"면서 2시간이나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점을 가리키며 "여기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어요. 지역담당자라는 어떤 부장님은 절 찾아와선 "실업급여 받게 해줄 테니 한 달 동안 유급휴가 받고 계약 종료하자"고 했어요.

제가 원한 건 상사의 사과와 분리조치였어요. 그런데 조용히 넘어가려는 회사 때문에 전 두 번 무너졌습니다. 상사를 형사고소하긴 했지만 멀쩡히 회사 다니는 꼴을 볼 수 없어요. 회사에서 별다른 조치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사도 상사지만, 배신감을 들게 한 회사도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A씨(50대 여성·서비스업 계약직)

피해자 전근, 퇴사 압박은 엄연한 불법

하루하루 회사에서 행위자를 마주쳐야 하고, 오히려 내가 그만둬 주길 바라는 노골적인 회사의 태도에 얼마나 힘이 드셨어요.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사업주는 행위자에 대한 조치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를 수행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를 압박하고 나가게 유도하는 건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6항 '사업주는 성희롱 발생 사실을 신고한 근로자 및 피해근로자 등에게 본인 의사에 반하거나 부당한 인사조치 등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를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A씨가 고충처리담당자와의 면담을 통해 회사 내 고충처리 접수를 한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사내 문제 제기가 잘 처리되지 않았을 때 신뢰는 더 크게 무너지게 되죠. 심지어 피해자가 스스로 그만둬 주길 원하는 게 느껴지면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은 훨씬 커집니다. 하지만 내부절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회사가 안 통한다면 고용노동부로

고용노동부

고용노동부 진정을 통해 사업장이 조치 의무를 지키지 않은 부분에 대한 시정과 처벌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행위자 조치와 징계, 분리 등을 하도록 하고, 나아가 추후 재발방지를 요청할 수 있어요.

진정을 넣기 전, 가장 중요한 단계는 '진정서 작성'입니다. 진정서를 쓸 때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내가 겪은 일들을 객관적으로, 감정과 구분해 정리할 것'을 기억하세요. 보통 피해자들은 이런 진정서를 써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사건을 설명하는 내용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섞어서 쓰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판단에 혼란을 주거나 사건 파악을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사건에 대한 설명 문단과 내 감정에 대한 설명 문단은 구분하는 게 좋습니다. 행위자가 했던 행위를 서술하고, 그 내용과 분리해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건너기 싫었다' '회사에서 마주쳤는데 너무 놀라서 화장실로 숨었다'는 식의 구체적인 그 당시 감정을 표현하시면 됩니다.

진정의 목적, 담당자의 시각 상기하기

이 진정서를 누가 보고, 나는 왜 제출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진정서를 읽는 건 담당 근로감독관이고, 그도 사람이거든요. 사건이 한눈에 파악이 되고 피해사실이 구체적으로 보여야 피해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고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피해자들은 진정서를 작성하면서 억울한 마음,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게 되고 그 감정이 거부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거든요. 이미 회사 태도로 신뢰가 무너졌는데 이번엔 잘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신고 후 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느낍니다.

그런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나의 피해를 어떻게 잘 입증할 것인지, 누구라도 내 편을 들어줄 수 있게 하는 데 집중하세요. 근로감독관 조사에 출석하기 전에 따로 경위서를 적어 두거나 증거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여전히 진정서 작성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전문 상담기관에 도움을 요청해 보세요.

동료들의 괴롭힘도 무시가 답 아냐

게티이미지뱅크

진정 접수 후 고용노동부 조사가 시작되면 대부분 회사는 압박을 느낍니다. 고용노동부 조사기간 중 의무 위반 사항이 확인되면 회사에 불리한 결과가 나올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A씨는 동료들로 인한 심리적 고통도 클 겁니다. 무시하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아 봐도 외면하는 동료들 때문에 느끼는 고립감과 쓸쓸함, 외로움은 결코 가볍지 않죠. 사내 고충처리 절차를 믿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시 시도해 보는 게 또 다른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괴롭힘 행동에 대한 중단을 요청하고 고충처리 신청을 이메일로 해 증거를 남기는 것도 방법입니다.

진정을 내고 사내 고충처리기구를 찾아가는 행위가 당장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어떤 시도를 했다, 피해를 막아보려 했다는 경험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애써 무시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부정적 감정에 빠지기보다는 어떤 대응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이 되기도 하거든요. 나중에 더 큰 피해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요.

외부 심리상담소를 찾아가 보는 것도 추천해 드립니다. 심리상담은 사건을 객관화하고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마음을 정리해 보는 과정입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를 포함해 다양한 기관에서 운영하는 심리정서 치유 프로그램 등을 이용해 보세요. 나 혼자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손길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해결책이 궁금하시다면 누구라도 제보를 해주세요. 이메일(119@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노동자회(대표번호 1670-1611)는 전국 11개 지부(서울·인천·부천·전북·광주·안산·부산·마산창원·대구·수원·경주)에서 '평등의전화'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차별과 성희롱을 비롯해 임금체불, 부당해고, 출산이나 육아를 이유로 하는 불리한 대우, 폭언·폭행 등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겪는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을 도와줍니다.


정리= 맹하경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당신이 관심 있을만한 이슈

댓글 1,324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