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아이콘의 진화...보여주기식 '본드걸'이 입체적 '본드우먼'으로

입력
2021.09.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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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개봉하는 '007 노 타임 투 다이'
본드걸 대신 본드우먼으로 부르기 시작
59년 동안 주목 받은 '본드걸'의 역사
1962년 첫 편 비키니 차림의 '본드걸' 등장
1970~80년대 '본드걸' 스타일 변화 시도
"영화 속 여성은 더 이상 액세서리 아니다"

29일 국내 개봉하는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제임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왼쪽)와 '본드우먼' 아나 디 아르마스.

29일 국내 개봉하는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제임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왼쪽)와 '본드우먼' 아나 디 아르마스.

제임스 본드 하면 떠오르는 여성, '본드걸'. 1962년부터 무려 59년 동안 007 시리즈에서 수많은 본드걸들이 스쳐갔다. 우리의 기억 속 본드걸은 한결 같을 것이다. 관능적 몸매를 드러내는 비키니 혹은 등이 깊게 파인 이브닝 드레스의 화려한 차림의 여성이다.

그러나 최근 007 시리즈에 변화가 감지됐다. 29일(전 세계 30일 개봉) 국내 개봉하는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2021)'의 촬영장에서는 본드걸이 아닌 '본드우먼'으로 부르는 등 변화가 있었다. 더 이상 보여주기식 본드걸은 관객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없음을 제작진이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항간에는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번 영화를 끝으로 퇴장하면서 어떤 암시를 주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여성이나 유색인종 배우가 제임스 본드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본드가 여성이 되면 '제인 본드'가 된다는 추측성 기사도 있다.

그렇게 되면 '본드걸' '본드우먼'이 아닌 이제 '본드보이' '본드맨'이 등장하는 것일까. '007 노 타임 투 다이' 속 본드우먼이 마지막일 가능성도 커 보인다.


비키니 입은 본드걸의 시작

1962년 007 시리즈의 첫 편인 '007 살인번호'에서 허니 라이더 역을 연기한 스위스 출신 배우 우슬라 안드레스는 비키니 차림으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62년 007 시리즈의 첫 편인 '007 살인번호'에서 허니 라이더 역을 연기한 스위스 출신 배우 우슬라 안드레스는 비키니 차림으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에머랄드 녹색빛 해변가. 하얀 비키니 차림의 늘씬한 여성이 바닷속에서 걸어 나온다. 허리엔 칼을 차고. 007 시리즈의 신호탄을 쏜 '007 살인번호(Dr. No·1962)'에 등장한 첫 번째 본드걸이다.

이는 본드걸 하면 전형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육감적 몸매의 여성에 비키니를 입혀 섹시한 매력을 드러냈다. 스위스 출신의 배우 우슬라 안드레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때부터 본드걸의 비키니 계보가 시작된 셈이다.

당시 본드걸의 역할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 시선에 머물러 있다. '007 살인번호'로 1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숀 코네리의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그저 보고 있을 뿐입니다."

안드레스는 이 장면 하나로 세계적 '핀업걸(pin-up girl·성적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관능미가 돋보이는 여성 연예인의 사진)'로 떠올랐다. 이러한 이미지는 60여 년간 제임스 본드의 여성들이 따라야 하는 1차원적 캐릭터였다. 그야말로 제임스 본드의 관심을 끌려는 곤경에 처한 여성들이었다.


1964년 '007 골드핑거' 포스터

1964년 '007 골드핑거' 포스터

이때부터 비키니 차림의 본드걸을 강조하는 포스터와 예고편이 자리 잡았다. 1964년 '007 골드핑거(Goldfinger)'는 '여자와 스릴, 재미와 위험과 함께하는 혼합 비즈니스'라고 홍보했다.

본드걸은 눈길을 사로잡는 역할로 강조됐고, 007 시리즈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고정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위해 본드걸의 목소리도 관능적이어야 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초창기 영화들이 여성 캐릭터에 일관되게 달콤한 음색을 주기 위해 성우가 더빙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9년이 되어서야 여성 배우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전적 본드걸 틀 깨기

1979년 '007 문레이커'에서 로이스 차일드(왼쪽)와 로저 무어가 노란 점프 수트를 입고 있는 모습.

1979년 '007 문레이커'에서 로이스 차일드(왼쪽)와 로저 무어가 노란 점프 수트를 입고 있는 모습.

007 시리즈는 1970~80년대 초반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였다. 본드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본드걸에 고전적 틀을 깨기 시작했다.

본드걸 스타일부터 변화했다.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1971)'에서 질 세인트 존은 상의가 긴 변형된 비키니를 입은 채로 손에 소총을 들었고, '007 문레이커(Moonraker·1979)'에선 CIA 요원으로 격상된 로이스 차일스가 본드와 연합 작전을 펴기 위해 노란색 점프 수트를 입었다.


1985년 '007 뷰 투 어 킬'에서 메이 데이를 연기한 배우 그레이스 존스의 모습.

1985년 '007 뷰 투 어 킬'에서 메이 데이를 연기한 배우 그레이스 존스의 모습.

특색 있는 캐릭터도 등장했다. '007 뷰 투 어 킬(A View To A Kill·1985)'의 흑인 배우 그레이스 존스는 전통처럼 굳어졌던 여성 캐릭터의 색채를 지웠다. 후드가 달린 이브닝 드레스, 가죽 보머 재킷 등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역할도 악당인 듯하면서 본드의 조력자로 보이는 듯 영화 속 주요 인물로 그려졌다.

본드걸은 눈길을 사로잡던 역할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로 승격된 듯했다. 비키니에 가려졌던 여성 캐릭터가 본드와 함께 총을 들고 액션을 펼치며 극을 이끌었다.


본드우먼의 첫 발

2002년 '007 어나더데이' 속 영국 비밀정보국 요원을 연기한 배우 로자먼드 파이크(가운데) 모습.

2002년 '007 어나더데이' 속 영국 비밀정보국 요원을 연기한 배우 로자먼드 파이크(가운데) 모습.

1990~2000년대 초반에 제작된 007 시리즈는 여성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어려움에 처하거나 가냘픈 여인 모습의 1차원적 캐릭터가 아닌 커리어우먼의 모습을 갖춰갔다. 본격적으로 '본드우먼' 시대로 넘어간 셈이다.

'007 어나더데이(Die Another Day·2002)'에는 두 명의 본드우먼이 등장한다. 007 시리즈 첫 편에서 비키니 차림의 본드걸을 재연한 할리 베리는 미국 국가안보국(NSA) 요원이었고, 로자먼드 파이크는 영국 비밀정보국(MI6) 요원으로 출연했다.

오렌지색 비키니를 입은 할리 베리가 영화 속 가장 유명한 장면을 선사했지만, M(주디 덴치)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세련된 정장 차림의 파이크가 기억에 남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텔레그래프는 "파이크의 모습은 본드우먼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해석했다.


2006년 '007 카지노로얄'에서 이중 스파이로 등장해 입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에바 그린.

2006년 '007 카지노로얄'에서 이중 스파이로 등장해 입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에바 그린.

007 시리즈 중 최고의 본드우먼으로 꼽힌다는 에바 그린. '007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2006)'에서 그는 입체적 캐릭터로 진화했다. 영국 재무부 회계사로 등장해 이중 스파이로 활약하는 등 복잡하고 발전된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다. 영화는 그린이 연기한 베스퍼 린드의 굴곡진 삶을 비추며 스토리에 힘을 줬다. 그는 '00' 요원이었던 신출내기 본드가 '007'로 성장하는 과정의 핵심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린은 본드우먼에 맞게 정장, 캐주얼, 드레스 등 다양한 스타일로 진정성 있게 접근했다. 그중에서도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의 '로베르토 카발리' 보랏빛 드레스는 여전히 영화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본드우먼의 미래

오는 29일 국내 개봉하는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활약한 배우 라샤나 린치.

오는 29일 국내 개봉하는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활약한 배우 라샤나 린치.

25번째 007 시리즈인 '노 타임 투 다이'는 네 명의 '본드우먼'이 출격한다. 노미(라샤나 린치)와 팔로마(아나 드 아르마스), 매들린 스완(레아 세이두), 이브 머니페이(나오미 해리스)다.

이번 영화는 이들 '본드우먼'이 어떻게 자신의 캐릭터를 찾아 완전히 살찌우는지 엿볼 수 있다. 특히 노미 캐릭터가 눈에 띈다. 그는 풋내기 '00' 요원으로 등장해 제임스 본드가 007로 성장하듯 그 과정이 그려진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번 편을 끝으로 제임스 본드 옷을 벗으면서 차기 유력한 제임스 본드로 라샤나 린치가 손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5년 '007 스펙터'에서 심리학자 매들린 스완을 연기한 배우 레아 세이두.

2015년 '007 스펙터'에서 심리학자 매들린 스완을 연기한 배우 레아 세이두.

노미의 스타일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수류탄 등 무기가 부착된 조끼와 카고 바지를 입고 총을 든 장면은 임무 수행을 중시하는 비밀 요원 그 자체다. 액션이 가득 찬 장면에는 하이힐을 벗고 납작한 플랫 슈즈를 신었다. 제임스 본드 하면 떠오르는 주머니가 많이 달린 필드 재킷을 착용한 점도 눈에 띈다.

2012년 '007 스카이폴(SKYFAL)'부터 얼굴을 비친 머니페이 캐릭터는 이번 영화에서도 실크 블라우스와 트렌치 코트가 전부인 옷장으로 캐릭터를 살린다. 다만 팔로마 캐릭터가 이브닝 드레스 장면을 담당한다. 007 시리즈 제작진은 비키니를 내세우지 않는 대신 이브닝 드레스를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2021년 '007 노 타임 투 다이'에 출연한 배우 아나 디 아르마스.

2021년 '007 노 타임 투 다이'에 출연한 배우 아나 디 아르마스.

007 시리즈에서 의상을 담당한 수티라트 라라브 디자이너는 "더 이상 여성 캐릭터는 액세서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미투(MeToo)' 시대에 살고 있다"면서 "여성 캐릭터는 영화의 배경을 채우는 단순한 '패션 플레이트(유행복의 본)'가 아니라 그들은 모두 자신의 임무가 있으며 특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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