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싸게 얻었다 했더니 신탁물건 사기... 하루아침에 '불법점유자'로

입력
2021.09.28 11:00
소유권 신탁회사로 넘긴 위탁자
주인 행세하며 보증금 가로채기
중개인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

서울의 한 빌라 밀집지역. (기사 내용과는 관련없음) 뉴시스

#2017년 서울 서초구의 한 건물을 취득한 A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산담보신탁 계약을 체결해 소유권을 신탁회사로 이전했다. 이후 A씨는 소유권이 없는데도 신탁회사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3년간 네 명의 세입자와 임대차계약을 맺고 보증금 6억3,000만 원을 챙겼다. 결국 A씨는 지난해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사기죄로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전세난이 심화하면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신탁등기된 매물로 인한 피해가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보증금을 챙기려는 가짜 임대인, 즉 위탁자가 '저렴한 매물'을 가장해 경제사정이 넉넉지 않은 임차인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빈번해서다. 신탁관계에 대한 설명 의무가 있는 중개인이 해당 사실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는 경우가 적잖은 점도 피해를 키운다.

저렴한 매물로 가장한 전세 사기

27일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임대인(위탁자)과 소유자(수탁자)가 다른 신탁등기 부동산에 임대차계약을 맺었다가 계약금이나 보증금 반환에 문제가 생겨 진행된 상담이 2019년 83건에서 지난해 88건으로 늘었고, 올해 들어선 8월까지 59건이다.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도 매년 1~3건이 같은 이유로 접수됐다.

피해는 주로 청년 등 주거취약계층에 집중됐다. 보증금이 낮을수록 보증 사고에 대한 임차인의 경각심이 덜하다는 점을 노린 탓이다. 들키기 전에 계약을 서두르려고 시세보다 저렴하게 내놓은 매물에 20, 30대가 현혹되는 경우도 있다. 2018년 신탁등기된 전세 매물로 100억 원대 사기사건이 발생한 서울 영등포구 라프하우스도 피해를 입은 142가구 대부분이 사회 초년생이었다.

최광석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신탁 사례가 늘면서 전세 사기 사건도 한 달에 한 건 정도는 접하는 편"이라면서 "피해 보증금은 주로 1억 원 남짓으로, 청년 세대나 주거취약계층이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신탁관계 숨기고 중개사도 사실 고지 미흡

소유권이 수탁자에게 넘어간 신탁물건은 통상 특약사항으로 위탁자의 대리 임대차계약 시 수탁자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위탁자가 임대차계약을 맺으려면 신탁회사의 동의를 받고 신탁관계가 기재된 신탁원부 등을 임차인에게 안내하는 게 일반적이다. 만약 수탁자 동의 없는 계약을 체결하면 임차인은 '불법점유자'로 간주돼 집을 비워야 하고 최악의 경우 보증금을 몽땅 날리게 될 수도 있다.

신탁물건을 이용한 사기는 신탁원부 발급이 번거롭고 관계 파악이 까다로운 점을 악용한다. 등기부등본만을 내세워 소유권이 위탁자에게 있는 것처럼 속이거나 신탁원부의 특약사항을 거짓으로 안내하는 식이다. 서울시 전월세보증금지원센터 관계자는 "신탁원부는 원칙적으로 온라인 발급이 안 돼 내용 확인이 용이하지 않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도 권리 관계가 복잡해 대응이 어렵다"고 말했다.

중개인이 신탁 사실을 사전에 제대로 고지하지 않아 거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피해자들도 적지 않다. 공인중개사법에 따르면 공인중개사는 대상물을 성실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야 하지만 일부 중개인들은 문제 소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임차인에게 거래를 종용해 사태를 키운다. 지난해 한국공인중개사협회 교란행위 및 불법중개 신고센터에 이 같은 문제로 접수된 중개 사고는 총 13건으로 전체의 5.5%를 차지했다.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법률적으로는 신탁 사실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중개인도 처벌 대상이지만, 중개인이 몰랐다고 하거나 중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면 고의성 입증이 어렵다"며 "현실에서 중개인이 (형사적) 책임을 진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전세난에 사기 물건 휘말릴 우려 커져...신탁물건은 피하는 게 최선"

전세 매물이 귀하고 가격이 급등한 요즘은 피해자가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다. 급한 마음에 권리관계를 따질 새 없이 시세보다 저렴한 사기 매물을 덥썩 계약할 수 있어서다. 전문가들은 "신탁물건은 계약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신탁회사의 동의를 받아 계약해도 만에 하나 강제집행이 이뤄지는 경우 순위에서 밀려 보증금 반환이 어려울 수 있어서다.

김대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생경제위원회 변호사는 "대항력을 갖춘 임대차계약은 보증금을 우선 배당받을 권리가 있지만 신탁물건은 신탁회사에 대출을 해 준 금융기관이 우선수익자라 임차인이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지 못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최다원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당신이 관심 있을만한 이슈

댓글 1,324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