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 '로버트'… 도살장 구조된 개들에게 이름이 생겼다 

입력
2021.09.16 11:00


경기 부천시의 한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28마리의 개들. 어두운 창고에서 개들은 다른 개들이 도살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동물구조119 제공


1일 오전 경기 부천시 임시로 마련된 유기동물 보호소, 초록색 철망으로 된 견사에서 개들이 사람을 반겼다. 중복인 7월 21일 새벽 동물구조단체 동물구조119부천시의 한 도살장에서 구조한 개들이다. 도살업자가 개들의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시 보호소로 이동시켜야 했지만 공간 부족으로 시내 모처에 임시 공간이 만들어졌다.

도살장에서 구조한 개는 총 28마리. 동물구조119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18마리를 보호소에서 데리고 나왔다. 이날 활동가들과 구조에 뜻을 모은 시민 3명은 보호소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10마리 개들의 이동을 도왔다.

중복날 새벽 도살장 급습으로 28마리 구해

경기 부천시 모처에 마련된 임시 보호소에서 보호소 관계자들이 개들의 이동을 위해 케이지 안에 넣고 있다. 고은경 기자

7월 21일 밤 12시 임영기 동물구조119 대표와 활동가들은 부천시 소재 여러 식당에 개를 도살해 납품해 온 도살장 앞에 모였다. 중복인 만큼 개를 도살할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동안 부천시민들의 신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폐쇄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임 대표는 "현행 동물보호법상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 같은 종류의 동물이 보는 앞에서 죽이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라며 "하지만 도살 현장을 잡아야만 동물학대로 인정돼 피학대동물 격리조치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기 부천시의 한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개들. 동물구조119 제공

새벽 3시 불규칙적으로 통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임 대표와 활동가들은 도살이 이뤄졌음을 직감했다. 도살업자들은 전기봉으로 개를 죽인 후 끓는 물에 넣어 털을 불린 뒤 이른바 '통돌이'에 넣어 털을 제거한다. 임 대표는 통이 도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과 도살장을 급습했다. 바닥에는 이미 죽은 개 두 마리가 있었고, 도살자는 죽은 개를 해체하기 위해 끌고 가고 있었다. 도살 시 사용했던 전기 쇠꼬챙이를 비롯해 낫과 도끼, 털을 제거하기 위한 통돌이, 토치가 발견됐다. 도살자는 현장에서 "죄송하다"며 도살을 인정했고, 경찰은 도살 도구를 증거품으로 압수했다.

자칫 도살업자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던 개들

임영기 동물구조119 대표가 경기 부천시 도살장에서 구조한 '레드'를 쓰다듬고 있다. '레드'는 보호소에 있을 때부터 사람을 보면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고은경 기자

도살 증거를 확보했지만 동물구조119 활동가들은 아침까지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피학대동물 긴급격리조치가 이뤄지지 않아서다. 현재는 관할 지자체 동물보호정책 담당 공무원에게만 격리조치 권한이 주어져있다. 도살업자가 마음만 먹으면 개들을 다른 곳으로 빼돌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침 9시 부천시 공무원이 현장을 방문해 개들을 격리조치해 시보호소 등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행법상 학대받은 동물의 경우 3일 뒤에는 피학대동물 소유자가 지자체에 보호비용을 부담하고 반환을 요구하면 학대당한 동물을 소유자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다. 다만 수의사 진단이 있는 경우에는 치료가 필요한 동안 격리, 보호할 수 있다. 실제 도살업자들이 3일 뒤 부천시를 찾아 반환을 요구했지만 부천시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을 근거로 거부했다.

도살장에서 구조된 개들이 동물구조119 입양센터로 온 뒤 케이지에서 나와 환하게 웃고 있다. 고은경 기자

동물구조119는 개들을 병원으로 데려가 검진하고, 접종과 치료에 들어갔다. 임 대표는 "도살업자가 수십 마리에 대한 보호비용, 치료비를 다 감당하고 데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라며 "이번에도 결국 개들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행 동물보호법의 피학대 격리 조치 맹점은 학대당한 동물의 소유권이 학대자에게 있는 것이다"라며 "학대자로부터 동물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다른 동물을 키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부분 1~3세, 이 개들은 어디서 왔을까

경기 부천시 모처에 마련된 임시 보호소에서 만난 도살장 구조 개들이 사람을 반기고 있다. 고은경 기자

28마리는 다른 개들이 전기봉에 죽고 털이 뽑히는 과정을 어두운 창고 안에서 지켜봐야 했다. 절박한 처지였지만 사납지 않아 구조과정은 순탄했다. 대부분 1~3세 가량의 진도믹스로 사람을 따랐고, 목줄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임 대표는 "사람을 따르는 정도로 볼 때 1m 짧은 줄에 묶인 채 길러지다 개장수에게 팔려 이곳으로 온 것 같다"고 추측했다.

검진 결과 28마리 가운데 절반은 심장사상충에 걸려 있었고, 자궁축농증에 걸린 1마리와 다리가 꺾여 있는 1마리는 긴급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중복 이전 구조한 18마리 가운데 5마리는 경기 고양시 유기동물 거리입양 캠페인(고유거) 단체에서 입양을 준비 중이며, 건강을 회복하고 중성화 수술을 마친 7마리는 해외 입양을 기다리고 있다. 중복에 구조한 10마리 역시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국내외 입양을 추진할 예정이다.

도살장서 나온 개들, 사람에게 꼬리 치며 애교

동물구조119 활동가들은 도살장에서 구조된 개들에게 영어 이름을 지어주었다. 해외입양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동물구조119 제공

1일 구조된 10마리의 개들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로 동물구조119 입양센터로 이동했다. 의외였던 건 이동하는 내내 짖거나 낑낑대는 소리 한 번 없었다는 점이다. 임 대표는 "도살장 문을 열었지만 소리가 나지 않아 처음에는 개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라며 "그만큼 공포에 떨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입양센터에 도착한 뒤 2, 3마리씩 한 공간에 배치됐다. 활동가와 봉사자들은 개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쓰다듬었다. 일부 개는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창문 밖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도살장에서 구조된 개가 동물구조119 입양센터에 온 다음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고은경 기자

건강검진과 중성화 수술을 마친 개들에게는 '로버트', '레드', '포드', '푸' 등의 이름이 생겼다. 영어이름을 지어준 것은 국내에서는 입양처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돼 해외 입양을 추진해서다. 임 대표는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개들도 한 가정의 반려견과 같은 소중한 생명이다"라며 "많은 분이 관심 갖고 입양에 나서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고은경 애니로그랩장
유기동물 구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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