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라도 지금은 틀렸다

입력
2021.09.12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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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끝없이 배워야 하는 직업이다. 의학에 처음 입문한 의대생에겐 모든 게 생경하다. 사람에겐 많은 장기가 있고 각각 하나의 학문으로 연결된다. 의대생은 지식을 암기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졸업하면 세부 과목을 선택하고 전공의 수련을 받는다. 그 과목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 현재 연구되는 내용을 공부해 전문의가 된다. 취득하면 새로운 시작이다. 의학은 계속 변하는 학문이다. 기존 체계가 다른 분류법으로 정리되거나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새로운 진단과 치료가 기존보다 환자에게 득이 된다고 명백하게 밝혀지면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일은 의사로서 책무 유기다. 그리고 의학뿐 아니라 사회도 같이 변한다. 그 흐름도 계속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학생과 전공의는 시험을 보거나 윗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벌을 받거나 야단을 맞기도 한다. 아직 배움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전제다. 하지만 십 년이 넘는 과정을 거친 전문의는 스스로 배울 수 있음이 전제된다. 공부하거나 배움을 청하지 않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전문의 이후의 세계는 고립되기 쉽다. 그래서 수많은 학술대회가 존재하지만, 가끔 너무 낡은 방식을 고수하는 전문의를 만난다. 전문의 취득 십 년이 되어가는 나부터 낡았을지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배움에 대해 끝없이 돌이켜보아야 한다.

나는 줄곧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일했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전공의다. 응급실의 실무는 보통 직장 생활과 많이 다르지 않다. 다양한 층위의 실무는 일차적으로 대부분 초년생이 맡는다. 연차가 쌓이면 감독과 결재를 맡는 관리직이 된다. 그 위치에 가서야 깨닫는 일도 많고 시스템을 통제하는 법도 익히게 되지만, 실무와는 거리가 조금 멀어진다. 무엇보다 주로 지시를 하게 되므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기 어렵다.

같이 일하는 후배인 전공의는 내 과거의 거울이다. 현재 가장 많은 환자를 대면하고 새로운 지식을 공부하면서 치열하게 더 나은 진료를 고민하는 젊은 의사들이다. 나는 그 시기를 오래전에 마쳤고 경험이 많아 책임자의 역할을 맡고 있지만, 막상 실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부족할 때가 있다. 또한 현재의 고충이나 불합리를 제대로 고민하지 않으면 과거에 남아 있는 상사가 되기 십상이다.

한 번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왔다. 폭행의 정도가 심했지만 다행히 상태는 안정적이었다. 침착해진 환자에게 폭행을 대신 신고해줄지 물었다. 환자는 조금 주저하다가 굳이 신고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전공의는 피해자 입장에서 일단 신고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나는 하지 말라고 했다. "반드시 신고하지 않아도 돼. 폭행은 반의사불벌죄이고 당사자가 의식이 명료해 신고하겠다면 얼마든지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으며 가정폭력은 신고 의무가 없어."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스테이션에 앉아 재차 곰곰이 생각했다. 내 답은 반사적이었다. 십여 년 전 비슷한 상황에서 신고했다가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야단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기준일 뿐이었다. 나는 전공의를 다시 불러서 신고하자고 했다. "생각해보니 방금 내 지시는 틀렸다. 시대도 변하고 사회도 변한다. 가정폭력은 신고 의무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사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시대다. 가르쳐주어서 고맙다."

남궁인_삶과 문화_필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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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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