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팝니다

입력
2021.08.26 20:00

ⓒ게티이미지뱅크


손의 떨림이 느껴진다. 그는 황급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는 듯하다. 항의인지 협박인지 비아냥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메시지가 여기저기 꼬여버린 문장들 속에 산발적으로 박혀 있다. 덜걱거리는 그 문장들은 그의 분노가 급하게 터져 나간 흔적이다.

내가 쓴 글에 대한 익명의 항의 메일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잠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다시 읽어 본다. 그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는 이주민이나 난민에 대한 혐오나 인종차별이 없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판이다. 삭제 전 메일 전체를 검시관처럼 뜯어 본다. 반복되는 숫자와 알파벳을 대충 엮어서 만든 메일 주소는 급하게 만들었다는 게 티가 난다. 빨리 가시 박힌 말들을 보내야겠다는 살기가 전해져 온다. 메일을 쓴 이는 말 그대로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분노의 흔적을 확인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니 뭘 이렇게까지?’이다. 메일을 쓴 사람의 입장을 상상해 본다. 새로운 메일 주소를 만들고,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문구와 내용을 창작해 내고,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또 그러면...류의 경고를 배치하고. 아이고, 많이 애쓰셨네. 어럽쇼, 이 기분 뭐지? 그의 수고로움이 안타까워 나는 문득 미안해진다.

항의인지 협박인지 구분 안 가는 메일을 받은 내가 왜 미안해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메일을 보낸 사람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감정은 ‘순수’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는 불이다. 불꽃은 그 안에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메일을 보낸 사람의 분노에는 어떤 계산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분노는 언제나 순수하다.

그런 분노가 지금은 인터넷 산업이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산품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오늘도 구매자들은 매력적인 분노 상품을 찾아 인터넷 공간을 기웃거린다. 사람들은 기사의 답글에, 자신의 SNS에 방금 쇼핑해 온 따끈따끈한 신상 분노를 전시한다. 소금의 생산과 유통이 고대 문명의 기반이 되었고, 향신료라는 상품이 근대를 만들었다면, 분노라는 상품은 21세기 사회를 건설(파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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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는 매력적인 상품이 되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말의 ‘화’라는 감정과 ‘분노’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감정을 가리키지만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는 다른 감정이 된다.

우리는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 이는 곧 감정이 사회적인 구성물이라는 뜻이다. 이름, 다시 말해 언어는 사회적인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감정은 사회적인 것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화’는 통상 개인적인 것, 그리고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화’는 내봤자 별 이득이 없는 감정이다. ‘난 화가 나’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반응이란 ‘너 왜 그래? 좀 참아!’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분노라는 감정은 경우에 따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분노는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때로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게 한다. 액션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분노를 통해 각성하고 엄청난 괴력을 발휘해 고난을 해결한다. 그리하여 그는 삶의 의미를 찾은 인간이 된다. 더 나아가, 성경의 ‘의로운 분노’라는 말처럼 분노는 유용함을 넘어 성스러운 감정이 될 수도 있다.

분노는 극장의 감정이다. 분노는 동조해 줄 관객이나 동료를 필요로 한다. 이런 이유로 분노하는 이들은 분노로 연결된 가상의 공동체를 상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는 분노한다’라고 선언하거나, ‘분노하라!’라고 호소하고, ‘당신은 왜 분노하지 않는가?’라고 질책할 수 있는 것이다. 분노는 공동체 안에서 더 잘 작동한다.

이목을 끌어야 돈이 되는 인터넷 주목 경제가 분노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여기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분노는 사회적으로 가치가 높은 감정이다. 분노하는 사람은 이 감정을 통해 자신이 이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로운 행동을 한다는 효능감을 느낀다. 분노의 이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분노를 표하는 것은 사회적 평판을 얻는 데도 도움이 된다. 우리의 주의력이 한정적인 자원이라면 분노라는 감정은 그 한정된 자원을 사용해 구매할 만한 가치가 있다.

분노가 매력적인 상품인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분노할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실의 편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분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몸으로 느껴지고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 자체는 분노를 일으킨 이유가 사실에 기반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표지가 되지 못한다.

분노 상품의 거간꾼들이 이용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거간꾼들은 분노의 재료가 된다면 가짜 뉴스든 뭐든 무엇이든 이용한다. 어차피 분노로 포장되면 우리는 그것을 진실로 느낄 테니까. 그래서 혐오도 성스러운 분노로 포장하여 상품화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맷 타이비는 이를 증오 판매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증오보다는 분노를 판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 같다. 사람들은 증오를 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노는 기꺼이 사고 싶어 한다. 분노라는 포장 안에 싸여 있는 것은 결국 혐오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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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들자면 끝도 없다. 유튜브와 각종 SNS에는 가짜 뉴스와 혐오를 분노로 포장하는 콘텐츠들이 차고 넘친다. 언론도 중립을 지키는 척하며 혐오를 분노로 바꿔치기한다. 최근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기사 제목이 있다. <‘페미 안산 메달 반납해야’ vs. ‘선수 보호해야’ 갑론을박>

여기에서 혐오 발언을 세탁하여 분노로 만드는 방식은 이렇다. 먼저, 혐오 발언을 ‘인용’하여 기사 내용의 해석틀 역할을 하는 제목에 배치한다. 제목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그 메시지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음으로 인용의 의사소통적 효과. 인용은 그저 남의 말을 가져오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나 텍스트에서 인용이 주는 효과 중 하나는 인용된 메시지가 실재하는 현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용은 강력하고 생생한 증거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안산 선수가 소위 ‘페미’이니 메달을 반납해야 한다는 발언의 논리는 수용 가능한 상식이 된다. 비상식적인 온라인 학대 행위는 이렇게 정상성의 지위를 얻는다. 혐오를 분노로 승격시켜 인준해 주는 순간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 기사에서는 ‘갑론을박’과 같은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 전략은 앞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혐오 발언에 정상성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그 발언을 대표성을 가진 것으로 기정사실화한다.

이렇게 분노 산업의 언어는 실재를 왜곡시킨다. 그리고 그 왜곡된 언어는 다시 일그러진 실재를 구축한다. 이 무한 반복의 개미지옥에 빠져 한국 사회는 한 걸음도 앞으로 못 나아가는 것 같다. 차별을 금지하는 방안을 논의하자고 할 때,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정당한 분노라는 말로 다시 논의를 원점으로 돌리는 식이다.

여기까지 쓰고 뉴스를 읽다 보니 이런 기사 제목이 뜬다. <‘너네 나라로 가라’... ‘아프간 난민’ 수용 두고 시민들 찬반 격론>.

아놔, 진짜로. 혐오를 분노로 가공해 판매하는 한국의 분노 산업은 여전히 활황이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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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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