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자 색출·'강제 결혼' 명단까지… 되살아나는 탈레반 공포 정치

입력
2021.08.17 19:33
수정
2021.08.22 01:48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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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휴대폰 검사·불시 검문 나서
"목표 리스트 수색, 표적 살인" 주장도
17일엔 아프간 정부와 평화협상 예고

17일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에서 탈레반 조직원들이 순찰하고 있다. 잘랄라바드=EPA 연합뉴스

17일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에서 탈레반 조직원들이 순찰하고 있다. 잘랄라바드=EPA 연합뉴스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탈레반의 ‘공포정치’가 다시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시내 곳곳에선 친(親)서방 부역자 색출 움직임이 이어지고 여성들은 '강제 결혼'이란 인권유린 앞에 놓였다. “포용적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선언이 아프간 현장과 다른 공언(空言)에 그치면서 인권시계는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영토 전역을 손에 넣은 탈레반이 대외적으로는 새로운 통치체제 구성을 위해 시동을 걸고 있지만, 결국 과거로 회귀할 거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공포 통치 조짐

1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등 외신을 종합하면,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을 장악한 지 이틀째인 이날 수도 카불 시내는 적막감만 가득했다. 상점과 관공서는 대부분 문을 닫았고 교통이 혼잡하던 도로에는 탈레반 깃발을 단 순찰 차량만 오갔다. 평소 남녀 행인들로 북적이던 주요 지역 거리 역시 이제 무장대원과 일부 남성들만 오갈 뿐, 여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BBC방송은 “음악이 흘러나오던 호텔에선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는 시민들이 ‘눈치 보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아직 탈레반 지도부는 사람들의 일상을 옥죄는 어떠한 공식 지침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이날 전국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완전한 이슬람 리더십이 있으니 모든 이들이 새 정부에 합류하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탈레반 미디어팀 소속 간부가 현지 언론 톨로뉴스에 출연해 여성 앵커와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과거 찾아볼 수 없던 이례적인 유화 제스처다. 그러나 탈레반 집권기(1996~2001년) 악몽이 생생한 시민들은 숨죽인 채 지내고 있다는 얘기다.

16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탈레반 조직원(오른쪽)이 시민들의 가방을 검사하고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16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탈레반 조직원(오른쪽)이 시민들의 가방을 검사하고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이미 곳곳에선 탈레반의 압제적 행태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주요 지점마다 검문소를 세우고, 지나다니는 시민들의 휴대폰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다. 정부와 일한 흔적이 있는지, ‘이슬람적이지 않은’ 자료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불시 검사도 서슴지 않는다. 한 여성은 남편과 머무는 호텔 방에 탈레반이 찾아와 짐을 뒤지고, 혼인 증명서 등을 요구했다고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말했다.

“누구에게도 복수할 계획이 없다”는 메시지 역시 온전히 믿기 어렵다. 외신들은 탈레반이 전직 공무원과 군인, 서방국과 일했던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굴람 이사크자이 주 유엔 아프간 대사는 안보리 긴급회의에서 “조직원들이 카불 전역에서 집집마다 수색을 벌이며 ‘목표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찾는 중”이라며 “이미 표적 살인과 약탈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탈레반이 겉으론 정상적인 수권세력처럼 보이고자 노력하지만 현실은 20년 전 공포 통치를 이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강제 결혼' 위해 12~45세 명단 작성도

여성에겐 더 가혹하다. 탈레반은 “히잡만 쓴다면 여성도 교육과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고, 혼자 집 밖에 나서는 것도 허용하겠다”고 말했지만, 노동 현장에선 여성들이 떠날 것을 압박받고 있다. 무장대원들의 가택침입도 빈번해지면서 여성들이 정부에서 일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소각하거나 대학 졸업장을 숨기는 일도 잇따른다.

탈레반은 여성들의 얼굴마저 가리고 있다. 가디언은 “무장 대원들이 부르카를 입지 않았단 이유로 식료품을 구하러 집 밖에 나온 여성을 위협하는 모습도 속출한다”고 설명했다. 부르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 모든 부위를 가리는 의복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상징한다. 결국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창고 속 먼지 쌓인 부르카를 꺼내거나 새로 구입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에 따라 지난해 한 벌에 200아프가니(약 3,000원) 수준이던 부르카 가격은 현재 2,000~3,000아프가니로 10배 이상 치솟았다.

지난달 31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탈레반 점령지 곳곳에서 여성을 조직원과 강제 결혼시켰다는 소식마저 잇따르며 두려움은 더욱 커지고 있다. 프랑스24는 “탈레반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대원들과 결혼시킬 12~45세의 미혼 여성 또는 미망인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고 전했다.

'탈레반 2.0'? 과거로 회귀?

시민들의 불안이 여전한 가운데, 탈레반은 이제 새 정부 구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지 매체 톨로뉴스에 따르면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는 카타르 도하에서 국제사회 및 아프간 내 정치세력과 접촉하고 있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탈레반 2.0’의 모습을 대외에 표방하며 공식 정부로 인정받기 위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이들은 17일 같은 장소에서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전 아프간 총리 등 정부 측과 평화협상도 재개한다. 이 자리에선 탈레반이 주도하는 아프간 정권의 대략적인 성격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란 관측이 높다. 그러나 이들의 종착지는 결국 1996년이 될 거란 분석도 나온다. 후세인 하카니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파이낸셜타임스에 “탈레반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할 것”이라며 “그들의 목표는 이슬람을 구현하는 것이지 현대 국가를 발전시키는 게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허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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