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문학의 역사를 사진으로 남긴 무명작가

입력
2021.08.09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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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주(1942.2.11 ~ 2021.6.25)

김일주는 1968년부터 근 50년간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을 8만여 컷의 사진으로 남긴 문인 전문 사진작가이자, 작가 1,937명의 육필 원고 등을 수집한 문학 애호가다. 그도 66년 등단해 두어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지만, 자신의 글이 아닌 작가들의 얼굴을 통해 한국 문학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의 작업은 생전에도, 사후인 지금도 가치를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2014년 6월 인천 자택 거실에 앉은 김일주. 아들 김종민 사진.

김일주는 1968년부터 근 50년간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을 8만여 컷의 사진으로 남긴 문인 전문 사진작가이자, 작가 1,937명의 육필 원고 등을 수집한 문학 애호가다. 그도 66년 등단해 두어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지만, 자신의 글이 아닌 작가들의 얼굴을 통해 한국 문학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의 작업은 생전에도, 사후인 지금도 가치를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2014년 6월 인천 자택 거실에 앉은 김일주. 아들 김종민 사진.

김일주(본명 김태영)는 한국 현대문학의 역사와 한 세대의 황혼을 사진으로 기록한 문인 전문 사진작가다. 그는 66년 소설로 등단한 소설가였지만, 자신의 글이 닿고자 했던 자리의 시인-소설가를 찾아다니며 근 50년간 사진 8만여 컷을 찍고, 1,937명의 육필 원고 5,576점과 육성 테이프 150여점, 각종 문학 행사 현수막과 플래카드를 참석자 서명을 담아 수집했다.

그는 문학이 모든 예술의 제왕처럼 존중 받고, 작가가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높다란 명예와 인기를 누리던 시대에 스스로 그 제단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들었고, 몸이 병들어 운신이 힘들어질 무렵에야 작업을 멈췄다. 그렇게 그는 자기 세대의 문학, 어쩌면 문학 자체의 이욺의 궤도를 따르며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기록한, 한국 현대문학의 가장 순정한 숭배자였다. 사진작가 김일주가 6월 25일 당뇨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김일주는 1942년 2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남편을 여의고 월남한 어머니(김정자, 2008년 작고)는 서울 남대문시장서, 6.25 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 정착한 인천의 어시장에서, 홀몸으로 잡화점을 운영하며 외아들인 그를 키웠다. 해방 전 해주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임시정부 일을 도운 적도 있다는 어머니는 아들이 글을 다루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고 한다. 장남 김종민(1965~)에 따르면, 공대를 지망한 아버지가 성균관대 국문학과에 진학한 것도 어머니의 뜻을 좇기 위해서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66년 어머니의 일구월심 바람대로, 소설가 오영수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그해 '현대문학' 4월호(136호)에는 그의 작품 '산령제'가 최정희 오영수 정한숙 박경리 홍윤숙 등 '선생님'들의 작품과 나란히 실렸다.

그가 인천 경기일보 기자로 취직한 것도 그해였다. 편집부에서 일하던 68년 시인 조지훈이 별세했는데, 신문사에도 고인의 사진이 없었고 '합동통신'도 사진 없이 부고 기사만 띄웠다고 했다. 그는 그 일을 납득할 수 없었다. 취업하던 해 월급에서 "쌀 몇 가마니 값"을 헐어 구입한 카메라를 메고 일삼아 작가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2002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와 사진찍기를 좋아했"고 "중3때 처음 카메라를 만졌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그 작업은 '흠모하는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는 핑계거리이기도 했다. 69년 창간한 '독서신문'으로 옮겨 문인들의 기벽을 소개하는 '벽(癖)’을 연재하고, 72년 갓 창간한 '문학사상'에서 작가의 서재를 탐방하는 '작가의 밀실'이란 코너를 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그렇게 기자로서 펜과 함께 카메라를 들었고, 작가가 아니라 관찰자 겸 기록자의 자리로 조금씩 물러섰다. 시인 이근배가 76년 창간한 '월간 한국문학'에 재직할 당시 그의 직함은 '사진부장'이었다.

김일주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사진 작업을 했"고 "소설 쓰기를 내 생의 업이라 정하고 공부하던 무렵에는 전설적 인물이 되어버린 상허와 지용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고 '한국 현대문학의 얼굴' 후기에 썼다. 그 꿈의 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진 왼쪽 위에서부터 이문구, 이봉구, 황순원, 김동리, 구상, 김춘수. 김일주 사진.

김일주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사진 작업을 했"고 "소설 쓰기를 내 생의 업이라 정하고 공부하던 무렵에는 전설적 인물이 되어버린 상허와 지용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고 '한국 현대문학의 얼굴' 후기에 썼다. 그 꿈의 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진 왼쪽 위에서부터 이문구, 이봉구, 황순원, 김동리, 구상, 김춘수. 김일주 사진.

그의 고백처럼 "문인들이 사진작가 알기를 우습게 알"던 때였고, "사진작가들이 설움을 많이 받"던 때였다. 그나마 기자 명함을 들고 취재를 다닐 때는 나았지만,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가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는 환대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나도 등단한 작가'라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그를 알아봐 주던 문우들이 있는 자리에선 마음이나마 덜 불편했을 것이다.

93년 마지막 직장이던 '인물계' 편집부장직에서 은퇴한 뒤로도 그는 고집스레 사진 작업을 이어갔고, 점점 작가가 아닌 사진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를 모르는 젊은 문인들이 "아저씨, 사진 찍지 마세요"라며 막아서는 일도 잦아졌다.

내면의 됨됨이는 그가 추구한 일 못지않게 견뎌낸 시간으로 더 오롯해지곤 한다. 그는 까마득한 문단 후배들에게 궂은 소리 듣고 네뚜리로 취급 당하면서도, 내로라하며 대거리하는 법 없이 조용히 물러서곤 했다. 단 한 번, 80년대 초 작가 김주영의 무슨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 자리에서 그가 대판 싸움을 벌인 일이 있었다. 거칠고 무례하기로 악명높던 시인 박남철이 다른 문인을 모욕하자 그가 못 참고 끼어 들었다가 박남철의 "사진쟁이 새끼가..."라는 말에 폭발한 거였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시인 이근배는 "김일주는 술을 즐기는 호인이었지만 불의를 보고 그냥 못 넘기는 결기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필름 값과 사진 인화 비용, 교통비 등을 대느라 월급 봉투를 집에 가져오는 예가 드물었다고 한다. 촬영만 해가고 사진은 왜 안 주느냐는 작가들의 따짐을 눙쳐 넘기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혼자서, 아들이 결혼한 뒤론 며느리(홍은희, 1944~)와 함께, 가게를 운영하며 가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묵묵히 지켜보며 단 한 번도 '왜 소설은 안 쓰느냐'고 물은 적이 없었다고, 장남 종민씨는 말했다. 어머니는 1997년 문화관광부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렇게 점점 흐릿해져간 그의 작가로서의 정체성처럼, 문학의 위상도 쇠락해갔다. 사진의 값어치도 점점 떨어지다가 2002년 한일월드컵을 기점으로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했고 이내 스마트폰까지 등장했다. 그의 96년 사진집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민음사)에 실린 가장 젊은 작가는 그해 5월 촬영한 소설가 신경숙이었다. 그가 카메라를 놓은 시점은 분명치 않지만, 2007년 첫 뇌경색으로 몸이 불편해진 뒤부턴 사실상 손을 놓았다.

2012년 1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명동 이야기' 전시 당시 이봉구 작가의 사진 곁에 선 김일주. 가족 사진

2012년 1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명동 이야기' 전시 당시 이봉구 작가의 사진 곁에 선 김일주. 가족 사진

그는 1982년 한국출판문화회관에서 국내 최초 '한국 문인 사진전'을, 자비로 열었다. 이듬해에는 시인 60인의 사진과 그들의 대표작을 엮은 엔솔러지 '시인의 얼굴'(우석)을 출간했다. 책에 수록된 사진 중 단 한 컷, 그를 사진작가의 길로 들게 한 조지훈의 사진은 유족에게서 빌려 복사한 거였다. 책 머리말에 그는 중3시절 소월의 '진달래꽃'을 만난 일화를 소개하며 "나는 시인이 아니"지만 "시인이고 싶었"다고, "시인은 정신의 제왕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갖고 있다"고 썼다. 그리곤 사진으로나마 '신륵사 전탑'의 벽돌처럼, "우리 문학탑에 한 개의 벽돌 구실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썼다.

물론 사진전은 돈이 되지 않았다. 대신 전시회를 열 때마다 이런저런 언론들이 그를 인터뷰했고, 그 덕에 단편적으로나마 그의 작업과 사연들이 소개되곤 했다.
70년대 시인 김지하의 출감 축하파티가 열린 서울 종로3가 술집 '탑골'에서 사진을 찍다가 '기관원'으로 오인 받아 봉변을 당한 일, "사진발 좋은" '오발탄'의 이범선을 한 시상식장에서 촬영하고 귀가한 날 밤 그의 부음을 듣고 황망했던 일, 그를 무척 아끼고 존중해준 작가 이문구의 말년 병실에서 너무 쇠한 모습에 차마 카메라를 꺼내 들지 못했다는 이야기...

작가들이 대체로 사진 찍(히)는 걸 몰상스럽게 여겼지만, 황순원, 이청준, 박경리는 특히 가슬가슬해서 카메라만 보면 뒤돌아설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도 나중엔 그의 끈기와 정성에 곁을 주기 시작했고, 말년의 황순원은 사진을 다 찍고 가려는 그를 붙들고 술을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인 천상병의 사진이 시빗거리가 된 일도 있었다. 그가 서울 인사동 '한국문학'에 근무할 때 찍은 천상병 사진을 두고 서울예대(당시 예전) 육명심(사진과) 교수가 자기 사진을 표절했다고 문제 삼은 거였다. 인사동 관훈미술관 주차장 흰 벽을 배경으로 반듯한 차렷 자세를 취한 시인의 포즈가 육씨가 찍은 사진과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주는 "포즈를 요구한 게 아니라 사진 한 장 찍자니까 그가 그렇게 서서 촬영했을 뿐"이라고, 그는 해명했다. 천상병의 그 포즈는 그가 겪은 동백림 사건의 고문을 환기하며, 세상 잊은 듯 막걸리 잔을 든 다른 사진과 함께 세대의 기억에 남았다. '명동백작'이라 불리며 서울 명동의 한 시절을 화려하게 누린 소설가 이봉구의 초췌한 말년 모습을 이봉구가 숨지기 1년 전 겨울 수유리의 한 대폿집에서 찍고, 인화된 사진에 눈시울이 시큰거렸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김일주의 사진들에는 그렇게, 그만의 사연들이 함께 담겨 있었고, 그는 그 사연의 일부를 2008년부터 약 5년간 '대산문화'에 연재한 '한국 문학의 얼굴'이란 코너에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스스로도 인정하듯 그는 한없는 애정을 문학(인)에 쏟았지만, 그 짧은 글에서도 심지를 곧게 지키려 애썼다. 그를 문단에 추천한 스승 오영수를 소개한 2009년 가을호에 그는 "79년 한 문예지에 발표한 한국인의 지역적 특성을 다룬 '특질고'라는 글로 인해 특정 지역(전라도 비하)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등 필화사건으로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고 썼다.

70년대엔 문예지의 작가 특집과 출판사들의 전집 출간이 유행이었다. 출판사들은 그에게서 옛 사진들을 구하곤 했고, 그는 흔쾌히 사진을 골라 제공했지만 '사례비'를 받은 일은 드물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돈을 안 주는 건) 상관 없는데 사진작가 이름도 명기하지 않을 때는 영 섭섭해요"라고 말했다. 1996년 '한국 문학의 해'에 대산문화재단이 그의 사진들로 문인 사진전을 열었고, '문학사랑' 등 문인 단체가 2007년 말 서울 예술의전당 아르코미술관에서 역시 그의 사진들로 '작고문인 102인전'을 열었다.

신문사와 문예지에서 일하면서 그는, 식자 후 버려지던 작가들의 육필 원고들을 일삼아 모았다. 그렇게 모은 원고지가 웬만한 트럭 한 대를 채울 만큼 쌓였다. 인천시가 유네스코 지정 '2015년 세계 책의 수도'에 선정되면서 인천 중구의 한국근대문학관이 '한국문학의 큰 별들, 육필로 만나다'라는 특별전을 열었고, 주요한부터 서정주 박경리 김현 등 46명의 원고 60점을 그에게서 빌려갔다. 그런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그는 신이 나서 사진과 원고를 뒤져 고르곤 했다. 당시는 다섯 차례나 반복된 뇌경색 후유증(왼쪽 편마비)으로 거동조차 불편하던 때였다.

아들 종민씨는 "아버지가 숨지기 일년 전까지 기거한 연안부두 인근 38평 아파트는 그렇게 수집한 원고와 문학행사 플래카드, 강연-행사장에서 녹음한 문인들의 육성 테이프로 창고처럼 변해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TV프로그램에 소개해도 될 지경"이라고 말했다. 김일주는 이사를 하면서도 책은 버려도 원고는 단 한 점도 못 버리게 했다.

2014년 김일주의 인천 연안부두 인근 자택. 평생 모은 자료들로 거실은 창고를 방불케 했지만, 그는 가족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한 점의 자료도 버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김종민 사진.

2014년 김일주의 인천 연안부두 인근 자택. 평생 모은 자료들로 거실은 창고를 방불케 했지만, 그는 가족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한 점의 자료도 버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김종민 사진.

그렇게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이 이제 유족의 몫이 됐다. 김일주가 인터뷰때마다 늘 마지막에 간곡하게 덧붙이던 소망, 즉 평생 찍은 사진과 자료 일체를 조건없이 기증할 테니, 국가든 누구든 번듯한 한국문학박물관이나 전시관을 지어 가져가주면 좋겠다던 바람도 아들의 것이 됐다. 다만 종민씨는 "지금껏 나 몰라라 해온 세상에 이제는 화가 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작업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평가 받아야겠다는 거였다. 연전 한 준 재벌급 오너 일가가 운영하는 문화재단측이 김일주의 수집품 중 육필 원고 일체를 건네 받으려 하다가 돌아간 일이 있었다. 받고자 한 측은 '기증'을 원했던 모양이지만, 가족들은 노동과 비용의 대가를 원했다. "대장장이 집에 칼이 녹슨다고 번듯한 가족사진 한 장 찍어주지 않았고, 아들 입학식 졸업식 사진도 안 찍어준"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모은 자료였다. 그런 아버지를 종민씨는 존경한다고 말했다. 아버지 영향으로 대학과 대학원서 사진을 전공한 종민씨에게 아버지의 사진과 수집품은 아버지의 분신이다. 평생 다른 문인들의 사진을 찍은 아버지의 영정은 그가 찍었다.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편집 후기에 김일주는 두 권으로 엮을 계획이 사정 때문에 한 권으로 줄어들었다며, 책에 누락된 문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적었다. "어느 문인도 큰 잔치에 곁다리 처지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리란 걸 누구보다 그가 잘 알았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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