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한일관계, 그리고 토착왜구론

입력
2021.07.22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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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일관계는 전환기적 상황의 반영
백년 强弱관계에서 수평관계로 이행 중
여전한 열등감 드러내는 토착왜구 용어

아쉬워하는 이들도 꽤 있지만 그림은 처음부터 뻔해 보였다. ‘하도 간청해서 잠깐 만나주었더니 또 무리한 얘길 하길래 딱 잘라 돌려보냈다’는 식의. 일본으로선 파행올림픽으로 더 퀭해진 스가 총리의 표정을 잠시나마 과장된 허세로 가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방일 취소의 명분을 깔아준 공사란 자의 ‘자위적’ 입방정이 어쩌면 다행이었다.

양쪽 다 추후 교섭의 여지를 말하지만 별 의미 없는 의례다. 한일관계는 국가 이해를 조율하는 통상 외교의 영역이 아닌,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국가정체성 차원의 승부다. 우리 입장에서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2015년 위안부협상과 1965년 한일협정 때로 되돌릴 수 있겠나? 일본이 흔쾌히 독도를 포기할 수 있나? 한국이 요구할 때마다 과거사를 사과할 수 있나? 다 어림없는 일이다.

갈등이 커질 때마다 관계 회복론이 나오지만 양국은 회복할 만큼 좋았던 시절도 없다. 이례적으로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걸쳐 일왕, 총리, 각료들의 사과성 언급이 잇따랐으나 이때도 망언과 신사참배 건 등이 끼어들어 늘 꺼림칙한 뒤끝을 남겼다.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양국 인식의 끝없는 충돌 원인이다.

어떻든 한일은 국제, 안보,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얽힐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계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이 미국의 3국 협력체제 복원 요구에 성의를 보여 대북관계 출구를 만들어보려는 의지가 방일 추진의 동기다. 중국의 발호와 북한 핵 위협에서 한국의 공조가 필요하기는 일본도 다를 게 없다.

일반론을 더 길게 할 건 아니다. 정작 주목하는 것은 갈수록 두드러지는 일본의 협량함이다. 방일에 대한 속 좁은 대응이나 올림픽에서 유독 한국에만 유난한 몽니도 그것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 정도로 막 나가진 않았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일본에선 한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가 늘 문제가 됐다. 크게 보아 우위에 선 일본의 여유 있는 자부심과, 상대적으로 열위인 한국의 자존심이 맞서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달라졌다. 백년 이상 이어져온 강약 관계에서 분명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정세현 평통 부의장이 최근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을 가능성에 굉장히 배 아파하는 것 같다"고 진단한 그 상황이다. 일본통 언론인 심규선은 머지않아 한일관계에서 골든크로스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한다.

부쩍 심해진 한국 때리기는 이런 불편한 감정의 발로라는 것이다. “왜 한국은 아직도 약소국처럼 행동하느냐”는 불만 속에서 역사적 책임을 묻는 일본 양심세력의 입지도 눈에 띄게 축소되고 있다. 한일관계는 근세 이후 처음으로 대전환의 시기에 와 있다. 한국의 자부심과 일본의 자존심이 충돌하는 반대 양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차제에 당부코자 한다. 우리끼리 친일이니, 토착왜구니 하는 말을 더는 입에 담지 말기를. 토착왜구는 구한말 일본침탈기에 친일 행각으로 개인의 영달을 꾀했던 매국노들을 지칭한 용어였다. 때때로 보수정치인들의 무신경한 대일 언사가 한숨짓게는 해도 친일의 이익은커녕 자해행위일 뿐인 판국에 무슨 토착왜구인가. 그렇지 않아도 양국에선 역사적 부채나 피해의식 약한 전후 세대가 주류가 된 지도 오래다.

그러므로 토착왜구는 우리 스스로를 계속 일본의 하위변수로 묶어 초라한 과거에 가두고, 일본엔 거꾸로 시대착오적 우월감을 유지시켜줄 뿐인 자기모멸적 용어다. 이런 용어를 고집하는 이들이야말로 여전한 대일 열등감에 갇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당하고 건강한 대일관계를 위해서도 이 창피한 용어는 버리기 바란다.

이준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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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한국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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