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기 선수 한밤 아파트서 대형 들개 제압... 산책 나온 입주민들 무사

입력
2021.07.15 21:00
수정
2021.07.15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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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비명 들려 가보니 반려견이 들개에 물려
로드FC 파이터 정원희 '니온벨리' 기술로 제압
"100일 된 아들 떠올라 주민들 다치지 않게"
개주인 사례 전화에도 "할 일 했을 뿐" 겸손

프로파이터인 정원희 선수가 경기에서 승리한 후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정원희 선수 제공

프로파이터인 정원희 선수가 경기에서 승리한 후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정원희 선수 제공

"왼손으로 들개 목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빨리 피신하라'고 손짓하며 소리친 기억뿐입니다."

프로 격투기 선수가 아파트 단지에서 반려견을 공격하던 들개를 제압하며 강아지 주인인 여성을 피신시켰다. 강아지는 안타깝게 숨이 끊어졌지만 여성을 포함한 10명 안팎의 아파트 주민은 무사했다.

사고는 지난 10일 오후 9시 40분쯤 대구 동구 W아파트 안에서 발생했다. 킹덤주짓수 복현 소속 로드(ROAD) FC 프로 파이터인 정원희(29) 선수는 친구와 헤어져 길을 걷고 있던 중 여성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100m 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려가 현장에 도착해보니 흰색 포메라니안이 덩치가 정 선수만 한 들개에게 목을 물린 상태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개주인인 여성은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고, 아파트 주민들도 선뜻 들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신장 168㎝에 플라이급인 정 선수는 본능적으로 주짓수 기술인 '니온벨리'(Knee on Belly)를 응용해 왼손으로 들개 목덜미를 움켜쥐고 보도블록 바닥에 눌렀다. 포메라니안이 '낑낑' 소리를 내며 풀려났다. 정 선수는 "빨리 동물병원으로 데려가라"며 오른손으로 '멀리 떨어지라'고 손짓했다.

양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쥔 정 선수는 개주인이 사라지고 나서야 들개를 풀어줬다. 당시 10명 안팎의 주민들이 "대단하다"며 한마디씩 건넸지만, 정 선수는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금방 자리를 떴다. 불과 몇 분 남짓 사이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는 들개를 제압하면서 가장 먼저 100일 된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아들도 자라면서 저런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파트 주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들개를 제압했다"는 것이다.

프로파이터인 정원희 선수가 경기 중 상대를 제압하며 주먹을 날리고 있다. 정원희 선수 제공

프로파이터인 정원희 선수가 경기 중 상대를 제압하며 주먹을 날리고 있다. 정원희 선수 제공

그가 대형 들개를 한손으로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포도나무 과수원 옆에서 사냥개를 여러 마리 키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키보다 큰 사냥개와 같이 살아온 정 선수는 목덜미를 제압하면 개를 상하게 하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들개도 생명이다 보니 너무 아프지 않게 제압할 정도로만 눌렀지만, 하마터면 물릴 뻔했다"고 엄살을 피우기도 했다.

정 선수의 선행 사실은 포메라니안과 산책하던 여성의 남편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서 알려지게 됐다. 남편은 당시 상황을 설명한 후 "아내의 안전도 장담하지 못할 상황이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꼭 찾아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며 커뮤니티 회원들에게 "찾아달라"고 당부했다.

정 선수는 사건 발생 5일 후인 이날 오후 4시 30분쯤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 선수는 "사례하고 싶으니 만나자"는 말에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2017년 프로에 데뷔해 5승 5패를 기록 중인 정 선수는 이날 인생에서 가장 멋진 '비공식 1승'을 더했다.


대구= 전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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